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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공기 Apr 29. 2018

가장 편한 곳

소소하다ㅣ 신정훈

호주 멜번의 청소부
저는 글을 막 씁니다. 브레인스토밍하듯 손가락 가는대로 놔두는 식입니다. 


작가 프로필 ㅣ 신정훈 

현상을 쿨하게 응시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즉흥적인 글쓰기 과정으로 풀어내려 한다. 




사는 입장이지만 나가기 전까지는 내 집이다. 내 집이란 말이 지목하는 곳의 변천사를 되짚는다. 몇 해 전에는 신흥역 가파른 언덕을 올라 만날 수 있는 월세 20만원의 집이었고, 그 후엔 신오사카 월세 5만엔 원룸이었다. 모두 자주 쓰는 물건들이 구비되어 있고, 속옷이 한 가득 있어서 언제고 바꿔 입을 수 있고, 내 이름으로 된 우편물이 모이는 곳이다. 


호주 영주권을 따고, 시민권을 따서 반 이방인이 될 예정이다. 아버지를 뵈러, 친구를 만나러, 가족 경조사에 참여하러, 장인장모님 뵈러 갈 모든 날을 합치면 365일이 넘을까? 한국은 먼 나라가 됐다. 어디를 가도 내 집이 아니다. 

호주 집은 넓다. 방 2개에 부엌, 화장실, 거대한 거실, 발코니가 있다. 나와 와이프가 이 큰 공간을 점거한다. 집 안 모든 것은 우리의 통치 하에 있다. 적당한 긴장이 있어야 글도 쓰고,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는다는 이유로 낮엔 카페와 외도하지만, 저녁 10시 넘으면 조강지처에게 돌아간다. 집은 너무 편해서, 그곳에서 나는 뭘 할 생각을 못 한다. 하는 일이라곤 라면을 끓이고 침대에서 유튜브 보는 정도다. 집 현관문에 영어 이름 become을 지어줬다. 나(I)는 현관문(become)을 넘어 잉여 인간이란 목적어(adjective)를 만난다. 집은 나를 극단의 무방비상태로 만든다. 무장해제 된 나는 빤스만 입고 잉여 세계를 배회한다.

영광스럽게 나의 가장 편한 장소로 뽑힌 우리집에게 축사를 보낸다. 돼지처럼 먹고 자지만 그 축사(畜舍)는 아니다.

오, 집! 너로 인해
나는 원한다면 언제고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낼 수 있다. 
나는 원한다면 언제고 유튜브 노래방 비디오를 틀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나는 원한다면 언제고 샤워를 할 수 있다. 
나는 원한다면 언제고 빨래를 돌릴 수 있다.
나는 원한다면 언제고 컴퓨터의 볼륨을 최대로 키울 수 있다. 
나는 원한다면 (와이프가 없다면) 언제고 블랙넛의 노래로 집을 채울 수 있다. 


become 현관문 밖을 나서면 형용사 conscious, mature, reasonable, well-mannered 등의 형용사가 등에 올라탄다. 라따뚜이 쥐새끼처럼 머리 위에서 이것저것 지시한다. 작은 행동에도 검열이 있다. 삼십대의 문화인, 매너 있고 바른 아시아 출신 남자가 되어야 한다. 집 밖에서 보낸 시간이 오래돼서 이제는 쥐새끼가 몸 위에 있는지도 까먹게 됐다. 문 밖 세상에 맞는 인간으로 자연스레 변한다. 그 경계를 잊고 산다. 가장 편한 공간에서 하는 행동을 언급할 때, 말 사이로 존재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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