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ml 다이어리 ㅣ 한공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글쓰기 공동체 '파운틴' 운영자
보통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송중기처럼 청순한 남자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름도 비슷하다.
3월의 마지막 날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벼랑끝에 매달려있는 기분이 든다. 그말은 즉 나름 오늘의 스릴을 느낄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새벽 5시36분. 오늘을 어떻게 보낼까 발동을 걸고 계획을 짜는 시간이다. 한시간 동안 고민한 분야는 오늘 정모 후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이다. 네이버에 홍대 맛집을 검색해보면 너무나 많은 추천가게들이 즐비해있어 딱 한군데를 고르기가 무척 힘들다. 결국 네이버따위 개나 줘버리고 내이버(내 마음의 포탈)을 가동시켜 내가 추억하는 홍대 술집을 검색해 보았다. 홍대에는 사라진 기차길이 있다. 지금 그곳은 공원이 되었다. 기찻길에 고기집이 두군데 있는데 하나는 소갈비집, 다른 하나는 목살집이다. 두 군데 다 유명해서 어디 가도 상관없지만, 난 목살집을 추천한다. 정작 내가 생각한 코스는 무엇을 먹느냐보다 먹고나서 함께 걸어볼 기찻길이 떠올라서다. 고기집에서 술을 마신 후 2차는 캔맥주를 사들고 기차길을 걸으며 마시는 것은 어떨까 그런 나만의 생각. 왠지 외국 여행 온 기분이 들지 않을까? 어쨌거나 오늘 술을 많이 마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난 원래 마지막 날에 폭주하는 경향이 있다. 매달 마지막 날에는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이 달 참 수고했어~하며 나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이 게으른 놈아 이달에 하기로 한 일을 또 못하고 끝내는구나~하며 책망하기도 한다. 후련해서 마시고 또 속상해서 마시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대한 굉장한 의미를 둬서 그런지, 내가 언제 죽는지 알 수만 있다면 꼭 죽는 날은 술을 마시고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곤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날에도 난 늘 혼자 술을 마셨다. 삼겹살 집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 먹으며 소주 3병을 까기도 했고,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으며 빽알 2병을 까기도 했고, 이자까야에서 혼자 오뎅을 먹으며 돗구리 5병을 까기도 했다. 이상하게 혼자 술을 마실 때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곤 했다. 마치 내 앞에 또다른 나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예를 들어 "넌 바보냐? 애초에 마음에 들지도 않으면서 왜 1년동안이나 사귀었던거냐?" 그렇게 혼자 따지곤 하는데 옆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이 어머머머...하며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곤 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가 유난히 마지막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심각하게 고민해봤는데 <종결의 미학>에 대해 나름 추구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흔히 '유종의 미'라고 하는 아름답게 끝을 맺는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끝이 안좋으면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다. 특히 내 이성교제의 끝은 모두가 안 좋았기 때문에 난 모든 연애에 있어서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 내가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병신아 누구나 헤어질 때는 거지같은거야!"하곤 하는데 난 나름 아름다운 이별도 고민해보았다.
아름다운 이별이란...뭘까? 일단 서로 헤어지기로 결정을 하게되면 한 일주일 간 연락도 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마음이 정리되는대로 이별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 여행의 목적은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서 가는 것. 규칙을 정한다. 절대 섹스를 하지 않기. 즉 애초부터 방을 두개 잡는다. 여행지에서 그동안 서로 서운했던 것에 대해 털어놓고 서로가 위로해준다. 미안해 그랬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다시 사귀지는 않아야 한다. 미련 때문에 이어지는 그런 질척거리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또 더럽게 헤어지고 만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여행을 하면서 지난 시간 함께 했던 순간들을 추억하고, 서로가 안 맞는다는 것을 기정 사실화 하면서 인간대 인간으로 순수한 여행을 하는 것이다.
난 한번도 이런 이별여행을 해 본적이 없다. 욕성이 오가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물고 뜯고 꼬집고 할퀴며 누가보면 철천지 원수가 아닐까 의심할 정도의 다툼끝에 휴전을 요청하며 계약을 종료했다. 그 후 우연이라도 길에서 마주쳤을 때 난 언제나 모르는 사람처럼 생까곤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난 헤어진 여자친구들을 후에 모조리 길에서 마주쳤다.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다.) 상대방이 날 발견했을 경우, 깜짝 놀라며 복잡한 심리가 표정에 드러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난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보며 스쳐지나갔다. 그녀들은 혹시 자신이 아는 그 남자가 아닌가? 그저 닮은 사람인가? 하며 의아해 할것이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 외면했던 이유는 아마도 모든 헤어짐이 너무 깊은 상처가 되서 애써 강한척 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난 그녀들과 재회할 때 웃을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오늘은 31일. 현재 시간 5시59분. 오늘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비장한 각오중이다. 잠깐 매일을 마지막날 처럼 보내면 어떻게 될까?
한공기님의 다른 글을 읽고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