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누는 대화 ㅣ 임나무
매일 500 페이지를 읽습니다. 제가 글을 쓴다면 '카프카'처럼 쓰고 싶어요. 카프카를 읽으면 약간 푸르스름한 흑백영화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작가 프로필 ㅣ 임나무
취미가 독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엄청난 독서광.
자신이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예전에 건강에 대한 염려가 한창 심했을 때
친구가 소개해준 검진 전문 병원에서 대대적인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결과문을 우편으로 받아 읽어보고나서 피식 웃었다.
거기에는 나의 근육량에 대해 이렇게 적혀있었다.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숨만 쉬고 있는 수준임"
어쩜 이렇게 콕 집어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건지, 정말 얄미워 죽겠다.
맞다. 나는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밖에 하지 않는다.
반드시 밖에 나가야 할 이유가 없으면 며칠이고 집안에 처박혀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니 제목에 적은 '길'은 내가 진짜 두 발로 걷는 물리적인 길은 아니다.
그 길은 시나 노래에 나오는 길이다.
어릴 때 학교 앞 문구점에서 두꺼운 스프링 연습장을 팔았다.
수학 문제도 풀고 영어 단어 빽빽이도 쓰던 그놈 말이다.
다 똑같은 연습장이지만 나름 신경써서 골랐던 기준은 어디까지나 표지 그림이었는데,
고등학교 때였나... 한 번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는 연습장을 샀다.
숲 속에 난 두 갈래 길 앞에서 어느 길로 갈까 고민하다가
한 길을 골라 결정하면서 '다른 길은 훗날에 걸어보리라' 했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 시의 내용이다.
그 연습장을 다 쓰는 동안 하릴없이 읽다보니 어느 날 문득 시가 가슴 깊이 와서 박혀버렸다.
만사가 가볍고 귀찮고 그냥 놓아버리고 싶기만 했던 반항아 시절에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는 시구는 어른들의 숱한 잔소리보다도 더 준엄한 예언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책임감이라는 것을 아주 막연하게나마 감지했던 것 같다.
겉멋에 외웠던 시는 선택의 상황마다 마음에 떠올라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다른 길을 만났다.
도종환 시인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이라는 시다.
프로스트처럼 앞에 놓인 길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그 모든 길을 지나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하는 시인의 고백은,
이 길, 저 길을 갈지자로 방황하던 나에게 적잖이 위로를 주었다.
내가 선택했던 길들의 무게로부터 조금 놓여나기도 했고,
또 앞에 놓인 길을 선택하는 데 대한 두려움도 한결 덜게 되었다.
설령 그 선택이 미래의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지라도 언젠가 되돌아볼 때엔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할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만난 길은 린킨 파크의 노래, 'Roads Untraveled’.
후회와 미련에 파묻혀 한 발짝도 더 못 걷는다고 주저앉아 울고 있는 각자 다른 인생들을
잔잔하고 엄한 목소리로 일으켜 세우는 린킨 파크 식의 잠언이다.
걸어보지 못한 길 때문에 울지 마.
남겨둔 길, 보지 못한 풍경, 상처와 실수들도 이젠 놓아줘.
이 노래의 백미는 마지막 구절이다.
너에게 친구가 필요하다면, 여기 내 옆에 자리가 있어.
(And if you need a friend, there's a seat here alongside me.)
지금도 그 대목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곤 한다.
전에는 길과 나뿐이어서 늘 혼자 길을 선택하고 혼자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길 옆 벤치에 누군가가 내 자리를 비워놓고 앉아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억지로 끌어앉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냉담하지도 않은...
딱 내가 원하고, 원하지 않는 그 경계선만큼의 위로다.
인생은 길이다.
진부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랴.
어쨌거나 길은 걸어야 한다.
때로 마음에 들지 않고 외롭기도 하지만, 주어진 길을 걷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자 실존이다.
지나온 길, 가야 할 길, 버려둔 길, 버려야 할 길, 그 길에 남겨진 것들, 기다리고 있는 것들...
그 모든 것이 온전히 나의 두 발로 감당해야 하는 내 몫의 인생이다.
이젠 근육량을 좀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연한 건강 염려증이 아니라, 길에 대한 대비와 예의로서 말이다.
어째 '숨만 쉬고 있는' 근육량으로는 버티기 힘든 길이 앞에 놓여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누구도 나 대신 걸어주지 못한다.
다만 깔딱 고개를 넘어갈 땐 쉬었다 갈 수 있는 벤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을 시간이다.
[시 소개]
사랑하는 시들을 소개하자니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예쁘게 봐주시고, 아껴주시길…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 http://bit.ly/1Qg4qxQ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http://bit.ly/1XOCR0e
Linkin Park, Roads Untraveled : http://bit.ly/21tI8wc (가사), https://youtu.be/wCnKl5VQ10s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