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주체적으로 우유부단하게 사는 방법

시시콜콜한 이야기 ㅣ 이정민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03 오후 2.30.52.png 대구아가씨
전 건망증이 심해서 병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전 10시반에서 11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은 몇 잔을 마셨는지...흘러간 시간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들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정민
직장인. 성격이 무척이나 쾌활한데 힘든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일지도 모름.




시장에 갔다. 오는 길에 단골 가게에서 대야를 샀다. 그 전부터 어떤 대야를 살 것인지 생각해놓았던 터라 머리 안에 있는 그놈으로 샀다. 가게에 갔더니 두 세트가 있었다. 러시아 인형을 가로로 자른 횡단면을 보는 것처럼 제일 큰 크기의 대야 몇 개 안에 그다음 크기 대야 몇 개... 식으로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대야 탑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원색 빨강과 파랑이, 하나는 파스텔톤의 분홍과 하늘색이 섞여서 쌓여 있었다. 원색 대야는 왠지 색깔에서 억척스러움이 묻어나는 것 같아서 파스텔톤의 하늘색 대야로, 제일 큰 것과 제일 작은 것을 사 왔다.

대야를 사 온 이유는 물을 담아놓기 위해서였다. 씻으려고 물을 틀면 차마 손 끝 외의 몸에는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물이 한참 나온다. 그럼 차가울 뿐, 깨끗한 물을 흘려보낸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처음 계획은 뜨거운 물이 나올 때까지 나오는 차가운 물을 대야에 모아놓고 뜨거운 물에 이미 대야에 받아놓은 차가운 물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뜨거운 물이라고 나오는 물이 따뜻해서 차가운 물을 섞어 쓸 수가 없었다. 차가운 물은 대야에 모아놓고 따뜻한 물을 쓰다 보니 금방 대야가 가득 찼다. 대야에 담아 놓은 물은 밤이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졌다.

그래서 생각한 차가운 물의 용도는 변기 탱크에 담는 것이다. 변기 뒷 탱크를 열어본 사람이 많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탱크의 뚜껑을 열고 래버을 내려보면 래버와 연결되어 있는 탱크 하단의 마개가 열리면서 그 물이 변기 물을 내리는데 사용되고 다음 사용을 위해 변기에 채워진다. 언제 어떤 이유로 이것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어릴 때 화장실을 이용하고 물이 내려가지 않아서 당황해하며 변기 탱크 뚜껑을 열어보고 그 원리를 깨우쳤던 것 같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오래되어서 변기에 물을 내리고 나면 변기 탱크에 물이 차는 소리가 들린다. 쉭- 쉭- 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이는데, 귀찮긴 하지만 변기 탱크에 물이 찰 때 뚜껑을 열어서 큰 대야에 모아놓은 물을 작은 대야로 몇 번 떠 넣으면 물이 금방 차서 변기가 조용해진다. 세라믹으로 되어 있는 무거운 변기 뚜껑을 조심조심 움직여야 하고 큰 대야에 담겨 있는 물을 옮기기 위해서 몇 번이고 앉았다 일어서야 하지만 변기 탱크에 물을 채워서 조용해지면, 그리고 또 동시에 큰 대야에 한껏 차있던 물을 반 정도 사용하면 물분자-이과병이긴 하지만 물 1g에 물분자 330해개가 들어있다. 330해개는 33 다음에 0이 21개 들어있는 숫자이다 여하튼 엄청 큰 숫자이다-들을 적당한 곳에 잘 사용한 것 같아서 보람차다.

이렇게 궁상떠는 것이 내 삶의 방식이다. 또 내가 얼마나 궁상떠는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예로 홍보용 볼펜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받는 볼펜을 그냥저냥 쓰다가 어느 정도 쓰고 연필꽂이에 꽂아놓고는 한다. 그런데 나는 여러가지 점들을 고려해보고-펜촉의 굵기와 필기감은 물론 리필심이 시판되는지, 오프라인 상에서 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지 등- 산 볼펜은 물론이거니와 홍보용 볼펜처럼 생각지 못하게 나에게 온 볼펜들까지 알뜰하게 다 쓰고 플라스틱 재활용함에 분리해서 버린다. 나의 궁상에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또 이면지. 이면지를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문서를 들고 있었는지도 모를 옛날 문서들까지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래도 학부시절 수학 문제 풀던 때는 이면지 사용량이 꽤 됬었는데 요즘은 통 이면지 쓸 일이 없어서 아주 쌓아두고만 있다.

이것은 내 인생관이기도 하다. 모든 것들은 나름의 쓸모가 있다는. 그래서 어떤 물건의 쓸모가 다 하기 전에는 한 번 나에게 온 물건들을 정리하기가 어렵다. 때로 어떤 물건들은 그 물건의 객관적인 용도 외의 용도를 가지기도 한다. 심지어 장식, 추억용의 물건들까지 가지고 있다 보면 너무 많은 물건들을 떠안게 되고 이사 다닐 때 힘들어진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된 이사를 되풀이하며 고생하다 보니 이사를 걱정하여 이제는 쉽게 물건을 들이지 않는다.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 싶으면 머리에 있는 플래시 메모리에 넣어둔다. 그래서 며칠 후에 날아가면 - 플래시 메모리가 그런 거니까 - 필요 없는 물건이다. 반대로 며칠 후에도, 그리고 또 며칠 후에도 머리에 몇 번이고 남아서 그 물건이 자신의 필요성을 나에게 어필하면 기록해둔다. 일생에 한 번 혹은 몇 번 살 것 같은 물건들은 플래너 위시리스트에, 그 외의 생필품들은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둔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인생에서 내 주위 물건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위 사람들이다. 같은 맥락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예를 들어 친구들- 깐깐하게 사귄다. 나한테 가까운 거리의 사람들일수록 더 깐깐하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특히 남자친구와 '사귈 때'는 동성친구와의 관계보다 그 시작과 끝이 명확하기 때문에 시작에서 더 깐깐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글쎄, 중요하긴 하겠지만 그 정도로?'라고 생각할 수 있을테고 다른 사람들의 이상형 목록과 비교해서 내 눈이 높다고 할 수도 없지만 몇 가지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약자에 대한 감수성. 전 남자친구, 사귀기 전이니까 그 당시에는 아는 오빠랑 운동을 자주 다녔는데 이 오빠가 동네 강아지를 자주 괴롭혀서 강아지가 이 오빠를 슬금슬금 피해다닐 정도였다. 당시 그 오빠는 나에게 '괜찮지만 동물을 학대하는 오빠'였고 그 오빠가 나에게 사귀자고 제안했을 때 나의 대답은 '오빠가 싫진 않지만 그 강아지랑 잘 지내시면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고 이야기했다. 기한은 3주 정도? 친구한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친구가 그 오빠는 강아지랑 사귀는 거냐고 배를 잡고 웃었지만 그 당시 나는 진지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 내 또래에 비해서 특별히 적지 않은 연애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은 충고랍시고 결혼하기 전에 -결혼을 하게 될지도 잘 모르겠지만 결혼을 목표로 해서 - 더 많은 남자를 만나보라는 충고를 한다. 저렴하게는 다다익선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로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나는 눈을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이야기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는- 그리고 또 연애경험 없는 후배에게 내가 충고랍시고 하는 이야기는 - 다양한 사람에 대면하여 나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은 내가 더 많은 남자를 만나는게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 희한하게 내 남자들에 대해서 남자들이 충고한다. 언니들은 인연 되면 만나봐라던데 - 나는 지금까지 연애경험에 만족하고 연애에 대해서만은 양질 전환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세포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부분을 세포라고 한다. 세포막의 여러 가지 기능 중 중요한 하나는 물질의 선택적 수용이다. 필요한 물질을 흡수하고 노폐물은 배출한다. 이 것을 움베르또 마뚜라나는 그의 저서 앎의 나무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생물을 특징짓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말 그대로 지속적으로 생성하는데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생물을 정의하는 조직을 자기 생성 조직이라 부르고자 한다.... 세포가 어떤 분자 X를 자신의 작업 과정으로 끌어들여 상호작용을 한다면 이때 상호작용의 결과는 분자 X의 속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성의 역동성 안으로 분자를 끌어들이는 세포가 분자를 '바라보는' 또는 다루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기본적인 단위인 세포도 이렇게 물질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데 세포의 집합인 사람이 우유부단하게 이 물건을 살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너무 차가운 물'이지만 나에게는 '그래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물'일 수 있고, 또 나에게는 쓸 수 없는 물건이지만 다른 이에게 특별한 용도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유부단하게 물건을 사는 것은 내 주위에 끌어들이는 물건을 심사숙고하여 고른다는 것이다. 나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 그 물건에 대해서 혹은 그 물건이 필요한 배경을 깊게 생각하여 어떤 물건 혹은 필요와 나 사이의 다양한 배치 중 한 가지를 고르는 것이다. 최근에 우유부단한 사람들을 '결정장애'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결정의 순간에서 생각이 자꾸자꾸 많아져서 머리가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버려서 결정을 할 수 없는데 내 일행이나 내 뒤에 기다리는 다른 손님이 있는 경우에는 정말 불편하지만, 나는 나의 '주체적인' '결정장애'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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