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3화. 모범생

소설 '안아주세요' ㅣ 화이

by 한공기


화이 프로필.jpg 땅고댄서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그는 중고등부 회장이었다. 휜칠한 키에 계란 형 얼굴, 흰 피부에 짙은 눈썹, 갈색 뿔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서글한 눈매에 저음의 목소리,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기타를 치면서 가스펠송을 부를때면 모든 소녀들의 가슴에 콩닥콩닥 불을 지폈다. 여느 철 없는 소년들이 빨갛고 파란 스포츠 점퍼를 입을 때 그는 카키톤의 점잖은 점퍼로 모범생의 이미지를 고수했다. 그것마저 희선에게는 그가 다른 이들과 다른 레벨의 고고한 인물로 느껴졌었다. 어느덧 매주 교회를 가는 목적이 그를 보기 위함이 되었다. 그렇게 2년을 흘려보내고 이제는 그가 고 3이 되어 더 이상 중고등부 회장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희선은 어쩐지 그가 영영 멀리 떠나버리기라도 할 듯 안타깝고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였을거다. 그녀가 그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한 것은.

"미안해. 나는 공부에 열중해야 해서 여자친구 같은거 사귈 여유가 없어. 하지만 네 마음만은 고맙다."


역시 선망의 대상이자 모범생 회장답게 상냥한 거절이었다. 그가 사는 아파트 현관 문 앞에서 초여름의 따뜻하면서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희선은 달아오른 볼을 식혀주는 바람이 반가웠다. 가로등이 켜지기 전의 푸르스름한 그늘 속으로 붉어진 얼굴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의 돌아선 뒷모습이 가늘고 길게 잔영으로 남았다. 고작 중학교 3학년이었던 소녀의 마음같은것은 까마득한 추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지만, 희선은 그 후 한동안 꽤 가슴아파했었던 걸 기어코 추억해 냈다.


"아유 고기 다 타네. 안먹어요? 타기 전에 빨리 먹어야지. 탄거 먹으면 암 걸려요, 암."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앞접시에 놓아주는 남자의 목소리에 희선은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시끌벅적 연기가 자욱한 삼겹살집에서 난데없이 왜 갑자기 회장오빠가 떠오른걸까? 아마도 이 남자의 뿔테안경 때문일거다. 그 너머로 보이는 긴 속눈썹이 예쁘다고 생각했던 때문일거다. 하지만 아니다. 이 남자는 그 회장오빠와는 거리가 먼 타입이다. 수다스럽고 경박해 보인다. 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은 마디가 투박한 손이다. 아마 기타같은거와는 거리가 멀 거야...


"마이클 오빠는 희선언니만 챙기네? 저는 안챙겨줘요? 샘나게. 제가 한잔 말아줄께요, 같이 건배해요"


찰랑거리는 긴 곱슬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앞쪽에 앉아있던 여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이 나이보다 훨씬 앳띄게 보이는 그녀는 활달한 성격까지 겸비해 클라스 내에서 유독 인기가 많았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소주잔 두개를 겹쳐서 소주를 따르고 그걸 다시 맥주잔에 붓더니 그 위에 맥주를 반쯤 붓고 젓가락 한짝을 잔에 넣고 다른 한짝으로 때렸다. 잔에 몽글몽글 거품이 순식간에 꽉 차 부풀어 오른다.


"자, 소푸치노 완성!"

"바이올렛님 진짜 최고네. 어쩜 소맥을이렇게 잘 만들어요? 많이 해본 솜씬데?"

"그냥 소맥이라고 하시면 섭섭하죠. 이건 레벨이 다른 소푸치노예요. 제가 좀 잘 하죠? "


그녀는 솜씨좋게 테이블에 소푸치노를 쭉 돌렸다. 희선 앞에도 잔이 왔다. 확실히 그냥 소주보다 훨씬 부드럽고 달다. 부드러운 거품이 카푸치노의 우유거품 못지 않다. 순식간에 폭탄주 하나로 주변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여자라니, 희선은 거품이 사그라지는것을 입술로 느끼며 천천히 소푸치노를 마셨다. 여자가 저렇게 폭탄주를 잘 만들고 술을 좋아하면 남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바이올렛은 인기가 많은걸 보면 신기하다. 이미 내가 요즘 흐름에서 뒤쳐진걸까? 이미 20대 후반이라는 생각이 희선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나도 2년 전에는 저렇게 싱그럽고 밝아 보였을까?


"자 자 여러분, 다같이 건배합시다."


새벽별과 젤소미나가 일어서서 모두를 주목시켰다.


"지난 한달간 수고하셨구요, 다들 벌써 많이 늘었어요. 선배들이 칭찬 많이 하고 있어요. 하하. 앞으로도 열심히들 하시기 바랍니다. 모두들 잔 채워주세요."


수업을 받고 있는 초급 동기생들과 선배 기수들까지 30여명이 함께한 이 뒷풀이는 매주 수업의 연장선이다. 초급 수업이 두 달 과정이니까 오늘은 말하자면 절반을 이수한 셈이다. 중간 격려를 한답시고 선배기수들 예닐곱명이 뒷풀이에 같이 참가해 식당 안은 꽤 북적거렸다. 처음 30여명의 동기들은 조금씩 줄어 오늘은 19명밖에 되지 않았다. 선배들이 테이블마다 앉아 고민 상담이나 조언 등을 해 주고 있는건 더이상 중도 포기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지도 모르겠다. 희선의 옆 테이블에도 선배 한명이 열연을 토하고 있고 모두들 진지하게 듣고 있지만 희선과는 거리가 멀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옆에 앉은 마이클은 지난주에도 희선의 옆자리에 앉았었다. 희선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희선은 그게 단순한 동기간의 사교활동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더 있는건지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바이올렛이 마이클에게 관심 있는거 아닌가? 두어명 기혼의 중년 아저씨들을 제외하고 젊은 미혼 남녀가 대다수이다 보니 서로간에 호감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거다. 마이클과 바이올렛은 서로의 폭탄주 제조 비법을 자랑하고 있고,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얘기에 호응하고 있다. 뭐 어쨌든 두 사람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희선님도 술 잘하나봐요? 저랑도 한잔 해요."


맥주잔을 입에 물고 멍하니 있던 희선을 보고 어느새 옆에 온 새벽별이 말했다. 그는 희선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


"아니예요, 잘 못 마셔요. 그냥 분위기 맞추는 거예요. "

"오늘 보니까 춤 많이 늘었던데요. 이제 좀 적응이 됐죠?"


새벽별이 옆 테이블에 있던 빈 의자를 끌고 와서 희선 옆에 앉으며 물었다. 희선이 대답했다.


"네, 처음보다 덜 어색해졌어요."

"확실히 처음보다 덜 긴장하는게 보여요."

"처음에는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았었는데, 이젠 남자가 리드하는게 뭔지 느껴지는게 신기해요."


자기도 모르게 살짝 들떠서 톤이 높아진걸 깨닫고 희선은 쑥스러움을 무마하려는 듯 잔에 남은 술을 홀짝 마셨다. 그런 희선을 보며 새벽별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지금 잘 하고 있는 거예요. 팔로워는 머리로 동작을 기억하려고 하면 훨씬 더 힘들어요. 그냥 느끼는게 중요해요. 희선님은 조금만 하면 금방 잘 출 것 같아요. 음악을 타는 감성이라는 게 있어요. 이러다가 나중에 인기 있어지면 나도 거들떠도 안보는거 아닌가 몰라?"

"어머, 아니예요."


새벽별의 칭찬에 희선은 귓볼이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희선의 빈 잔에 맥주를 채워주는 새벽별의 팔은 탄력있고 튼튼했다. 매일 회사에 있는 헬스장에서 웨이트를 한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자기 관리가 투철한 사람이구나, 희선은 생각했다. 적당히 몸에 붙는 차콜 컬러의 티셔츠 위로 가슴 근육이 드러나 보인다. 구리빛 피부 때문에 웃으면 하얀 이가 유난히 돋보인다. 이런 남자다운 외모에 부드럽고 섬세한 성격이라니,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게 당연했다. 그런 새벽별이 친구 미영의 소개 때문인지, 부쩍 희선을 신경써 주는 눈치였다. 희선은 그게 조금 부담스러우면서도 은근히 기분 좋았다. 사실 살짝 두근거리기도 했다. 재원과 헤어진 이후로 이런 설레는 감정을 이렇게 빨리 다시 느낄줄이야.


"오늘 야근 때문에 캔디가 못 와서 섭섭하겠어요."


잠시 끊어졌던 대화를 다시 이어가려는 듯 새벽별이 말했다.


"그래도 혼자 보다는 먼저 시작한 친구가 있어서 든든하죠?"

"그렇긴 한데, 생각보다 자주 보게 되지는 않네요."


희선이 웃었다. 미영과 희선은 고등학교 때부터 한 동네 살면서 친하게 지낸 오랜 친구였다. 대학교를 다른 데 다녔어도 동네가 같았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친구가 많지 않은 희선에게 미영은 유일한 상담자이자 조언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희선이 재원을 만나기 시작했을 즈음 미영은 땅고를 시작했고 둘은 자연스럽게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희선이 시간을 내서 만나자고 해도 미영은 늘 춤추러 가는게 우선이어서, 정말 얼굴 한번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미영도 그게 마음에 걸렸던지 어느날 불쑥 자기랑 땅고 같이 하자고 희선을 졸랐던 것이다. 하지만 희선이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난 한달동안 수업 첫날 잠깐 얼굴 봤을 뿐, 카톡 메세지만 주고 받은게 다였다. 같이 땅고 춰도 잘 못 만나는건 똑같네 뭐. 희선이 뭔가 이어서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미 은근 취한듯 보이는 바이올렛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새별쌉, 우리 뒷풀이 끝나고 다시 연습실 가서 놀면 안돼요?"

"지금? 이미 12시가 다 되었는데? 원칙상으로 밤 12시 이후에는 못들어가게 되어 있어. 건물주가 시끄럽다고 했거든."

"아이, 우리 조용히 들어가서 음악도 조용히 틀고 놀께요. 네?"


바이올렛이 특유의 애교 섞인 콧소리를 내며 조르자, 마이클이 거들며 주위의 동조를 구했다.


"맞아요, 우리 더 연습해야 해요. 그렇죠?"


모두들 맞아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별은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젤소미나를 불러서 잠시 상의를 하는 듯 하더니 포기한듯한 얼굴로 테이블로 돌아와서 말했다.


"그럼 정말 조용히 해야 해요. 담배 피우러 나가도 안돼요. 주인 아주머니가 위층 사셔서 걸리면 곤란해진단 말이예요."

"네! 우리 조용히 놀께요. 약속해요!"


순식간에 뒷풀이가 정리되었다. 무리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들과 밤을 새워서라도 끝까지 열정을 불태우겠다는 이들로 나뉘었다. 희선은 망설였다. 어차피 금요일 밤이라 내일 일도 없고,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 봐야 할 일도 없긴 했지만, 술기운에 들떠 왁자지껄한 이 무리에 굳이 끼고 싶은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다. 게다가 삼겹살 이후의 땅고라니... 서로 옷과 머리에서 나는 냄새는 어쩔거야.


"갔다가 가요."


희선이 머뭇거리는걸 눈치라도 챈 걸까.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희선을 지나쳐 나가면서 새벽별이 살짝 속삭였다. 쳐다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앞서가는 무리에 섞여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다. 방금 뭐지? 희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잘못 들은거 아니지? 분명 내 귀에 대고 속삭인거 맞지? 그러고는 시침 뚝 떼고 아무 일 없었던 척 한다는 건 다른 사람은 모르게 하고 싶다는 뜻인가?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아직 가을이 묻어나기에는 이른 후덥지근한 바람이었다. 희선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떼어 귀 뒤로 넘겼다. 갑자기 연습실에 몰래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계단은 어두웠다. 살금살금 내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불을 켰다. 누군가의 제안에 최소한의 불빛만 켜놓기로 했다. 희선은 벽 앞 구석에 있는 스툴의자를 찾아 앉았다.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에어컨의 웅웅거리는 소리나 사람들의 속삭이는 대화 소리가 음악에 묻혀 꿈결같이 아련하게 들렸다. 어느새 짝을 지은 커플들이 그동안 배운 어설픈 동작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희선은 눈으로 새벽별을 쫓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선곡해서 틀어주기도 하고, 젤소미나와 한참 무언가 의논을 하기도 하고, 잠시 안보이더니 어느새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수를 종이컵에 부어 나누어 주기도 하고,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기도 했다.


바쁘네. 희선은 시선을 거두어 춤추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어슴프레한 조명 아래 춤추는 실루엣들이 거울에 어른거렸다. 아까 마신 소푸치노의 취기가 올라오는지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희선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사람들의 춤 추는 모습이 꿈인듯 현실인듯 몽롱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바이올렛이 새벽별과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고, 새벽별은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가 흩어진다. 하지만 희선의 눈은 새벽별이 바이올렛을 데리고 플로어로 나가는 모습을 따라갔다.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희선은 가슴 안쪽이 아릿해져 오는 걸 느꼈다. 그가 희선을 찾아 올거라는 기대를 했었나. 삼겹살집에서 그가 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던 것 처럼. 아까의 속삭임은 뭐였지. 오늘따라 땅고 음악이 이렇게 서글프게 느껴질까. 한잔 마신 폭탄주 때문에 더 감성적이 된 걸까.


"저랑 연습하실래요?"


눈앞에 뽀얗고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우리 동기중에 이런 사람도 있었지, 참. 희선은 수업 내내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타입이었던 그를 기억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뒤풀이에서도 옆 테이블에 앉았었던 것 같다. 그의 팔에는 근육은 커녕 털도 별로 없었다. 뽀얗고 매끄러운 피부라니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희선은 생각했다. 키도 자그마했다. 170이 겨우 넘나... 그는 목둘레가 둥근 크림슨 컬러의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이마로 흘러내린 차분한 머리스타일에 은색 안경테까지, 전형적인 착한 모범생 이미지였다. 교회 회장 오빠가 다시 떠올랐다.이런 사람도 땅고를 배우고 싶어서 왔다는게 의아했다. 땅고는 남미 춤이니까 어쩐지 세련되고 섹시한 남자가 어울릴텐데. 희선은 자기도 모르게 새벽별을 힐끗 쳐다봤다.


뽀얗고 커다란 손은 멋적은 듯 씨익 웃었다. 이가 큼직하고 가지런하다. 희선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여기 앉아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도 초라하고, 그렇다고 집에 가기도 옹색하니 난감한 상황에 어쩌면 잘됐다 싶었다. 새벽별 때문에 온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거다. 어쨌든 순전히 이 남자의 가지런한 이 때문이다. 비록 둥글둥글한 인상이 지나치게 착해 보여서 어딘가 땅고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가지런한 이가 마음에 들어 어쩔수 없었던 거이기로 했다. 거울을 얼핏 보니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 셔츠, 검정 바지, 질끈 묶은 검정 생머리,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여자가 낯선 남자의 팔에 이끌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선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나도 섹시한 남미 여자는 아닌걸.


세상이 빙빙 도는것 같이 몽롱했다. 남자다운 까무잡잡한 피부에, 가슴에 곱슬거리는 털이 살짝 보이게 셔츠를 열어놓은, 근육질의 팔뚝이 멋진 남자와 춤을 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희선은 스텝을 밟았다. 뭐 상관 없지 않나. 여기는 어두컴컴하고, 나는 술이 취했고, 상대가 누구이든 내 상상속에서 멋진 남미 남자와 춤을 추고 있으면 그걸로 됐지... 땅고 음악은 서글프고, 모두들 소근소근 왁자하고, 나는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공간에 둥둥 떠있고, 내 파트너의 손은 큼직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멋진 구렛나루의 남미 남자였다가 새벽별의 구리빛 근육질이었다가 모범생 교회 오빠로 바뀌었다. 모범생이 이런 관능적인 땅고를 추다니, 어쩐지 의외의 일탈이 아닌가. 그 오빠도 어딘가에서 춤을 추고 있다면 참 멋지겠다 생각했다.


image1 (2).PNG 그림: 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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