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연애 ㅣ 변채림
대학 때는 일본어랑 미술사를 전공했는데, 교양으로 들었던 건축사가 너무 즐거워서 흔한 건물덕후가 되었습니다.
건축이라는 건 위대한 인류가 일궈나가는, 장대한 역사의 배경..일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건물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인간에게는 다른 어떤 예술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작가 프로필 ㅣ 변채림
해가 중천에 뜨면 나가서 맥주를 마시고 공원이나 도시에서 광합성을 하는 게 제일 좋아하는 일과입니다. 햇수로 5년 차 인스타그래머로, 글보다는 사진으로 일기를 씁니다. 호주 멜번으로 이사온지 10년이 좀 넘었고 작년 초에 호주 여권을 받았는데도 영어는 여전히 삶의 장애물입니다. 미래에는 소박하게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게 꿈인 것 같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고정관념을 나도 모르게 체화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이삼 년 전부터 멜번 시내에 자라, 탑샵 같은 인터내셔널 브랜드가 속속 생겨남과 동시에 나는 충실한 세계 자본의 고객이 되어갔다. 그중에서 가장 즐겨 찾는 곳은 스웨덴을 기점으로 한 스파 브랜드 h&m이다. 에이치엔엠이 동남아 등지에서 생산한 상품들은 기존에 80불을 지불하고 손에 넣을 수 있던 중국산 폴리에스터 원피스 따위와 비교했을 때 품질 면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가격은 겨우 절반에 불과했다. 혁명적인 가격대와 더불어 내게 강렬한 첫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은 에이치엔엠이 입점한 건물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이들이 어떻게 역사적인 건물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는가가 흥미로웠다.
건물의 공식적인 이름은 Melbourne GPO (General Post Office), 구 우체국 건물이다. 구글의 지식을 빌려 소개하자면, 공모전에서 (우승자 말고) 2등을 차지한 A. E. Johnson의 디자인을 채택하여 2층 건물로 일단 완공된 것이 1867년이고, 지금과 같은 3층 건물이 된 것은 1887년이다. 이때 GPO의 아이콘인 시계탑도 추가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디자인 요소는 1층, 2층, 3층의 기둥이 세 가지 고전 스타일을 차례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1층은 겸손한 도릭 기둥, 2층은 보다 권위적인 아이오닉 기둥, 3층은 화려한 코린티안 기둥으로 각각 장식했다. 고전 스타일 건물은 건물의 역할을 드러내기 위해 한 가지 스타일을 골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체국을 증축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편물의 수요가 급증했다는 의미이니만큼 19세기의 멜번은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3층을 얹으며 기존의 보수적인 건물에 약간의 드라마를 추가한 듯하다.
GPO는 줄곧 현역으로 사용되다 정부의 결정에 따라 2001년에 우체국의 역할을 마쳤고, 그해 9월 화재로 한 차례 전소하였다고 한다. 2004년에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식당과 카페가 있는 쇼핑몰의 모습이었다. 물론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물이니만큼 기존의 구조는 거의 그대로 복원해놓았다. 이 쇼핑몰이 내가 기억하는 예전의 GPO로, Acne, Alpha 60, Sass&Bide 같은 디자이너 부티크가 통로 양편으로 자리했고 그 가운데 있던 마카롱 가게까지 고급진 공기를 자아냈다. 나는 쇼핑보다는 기차역으로 가로질러 갈 요량으로 그곳을 들락거렸다.
다시 에이치엔엠 이야기로 돌아와 기억을 더듬어 보겠다. GPO가 개보수를 위해 문을 닫은 뒤로 세계적인 브랜드가 입점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얼마 후엔 그게 에이치엔엠이라는 게 밝혀졌다. 개장은 유명 디자이너와의 협업 상품 발매일과 맞춘 어느 때였다. 오픈 직후, 두 손을 모아 에이치엔엠의 강림을 기다리던 이 변방국의 패피들은 못해도 이 주 넘게 비가 오나 맑으나 숨 막히게 붐빌 게 뻔한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섰다. 그들과 함께 몇 시간을 기다릴 자신이 없던 나는 열기가 식기를 기다렸다.
달뜬 공기가 가신 어느 오후 마침내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맘대로 드나들 수 있는 입구가 세 개이지만 당시에는 몰리는 인파를 통제하기 위해 입구 하나와 출구 하나만을 두고 있었다. 빗방울이 묻은 우산을 접고 아치형 입구로 들어섰다. 짧은 통로를 몇 걸음 지나자 2.5층 높이의 실내가 눈에 꽉 찼다. 누렇지 않은 백색 조명에 흰 벽, 거기에 천창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이 높이 선 마네킹들의 옷을 돋보이게 했다. 음악 소리는 내부를 얼기설기 채우고 있었다. 스피커가 통행로에서 멀리 설치된 것 같았다. 조명이나 음향효과가 어우러져 옷이 빽빽이 진열되어 있는데도 공간이 여유로워 보이는 착시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지나치게 위압감을 주지 않으려는 듯 마네킹들을 그네에 태워 적당한 높이에서 시선을 끊어주는 배려도 있었다.
건물의 생김새나 주변부에 미치는 영향력, 역사적 맥락이나 신 공법을 사용했는지 등은 건물의 중요성을 판별할 때 흔히들 논할 부분이다. 물론 이외에도 무수한 체크포인트가 있지만, 나의 일상적인 건물 감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즉각적으로 보이는 시각적인 요소와 사용자로서의 경험 두 가지로 추려진다. 즉 '스펙터클 spectacle'과 '퍼블릭 publicity’이라는 키워드가 중심이 된다. 건물의 외장이나 내부 공간의 스펙터클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또한 어딘가 크고 좋은 회사의 소속원도 정부 요원도 아닌 내가 주로 경험할 곳은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장소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구 우체국 건물을 활용한 에이치엔엠의 인테리어에서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첫째로, 막대한 물량이나 정신 나간(듯이 저렴한) 가격부터 충격적이었지만, 에이치엔엠 측에서 제시했던 입구->출구 루트의 골자에는 계획된 문화충격이 있었다. GPO가 우체국일 당시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던 입구는 폐쇄하여 놓은 중간 출입문이었다. 이 사실은 이 입구->출구 루트가 에이치엔엠이 계획한 스펙터클의 일부임을 확실시한다. 오픈 기간 동안 모든 방문객들은 시야가 제한된 비교적 어두운 구역을 지나 희고 널찍한 공간에 맞닥뜨리게 된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공기 변화를 통한 공간 경험은 방문객의 심상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또, 브랜드 하나가 2층 건물 한 채를 통째로 터서 사용하는 형태는, 통로와 입점한 가게들이 명확하게 구획 지어져 있는 쇼핑몰보다는 현대미술관의 거대한 설치작품에서나 볼 법한 대범함이다. 1세기가 넘는 동안 멜버니안에게 일상이었던 우체국 건물은 이미 쇼핑몰로 한 차례 변태 했었다. 익숙함을 다시 한 번 탈피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둘째, 위에서 언급했 듯 우체국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GPO는 어떤 기업에 팔리냐에 따라 대중과 영영 멀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10층을 증축해 고급 호텔로 사용하겠다는 요청도 있었다는데, 만일 그랬더라면 일반 시민이 경험할 수 있는 요소는 외부 디자인이나 호텔 카페, 식당 정도였을 것이다. 위에서 말했 듯 쇼핑몰로 변모한 GPO는 쇼핑몰이면서 도시의 골목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리노베이션 후에 에이치엔엠이 GPO의 1, 2층을 통틀어 사용하게 되면서 전과 같은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동시에 그 어느 시절보다 건물의 안팎을 대중에게 오픈하게 되었다. 우체국일 당시 GPO의 내부 대부분은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된 사무공간이었고, 쇼핑몰일 당시 2, 3층은 회원제 뷰티 클리닉이나 개인 사무실 등이 입주한 상태였다. 에이치엔엠의 입점 이후 누구든지 역사유산을 (예약 없이) 걸어 다니며 경험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세계 자본의 유입이나 문화유산의 재개발이 언제나 밝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한 일반인 대상의 강연에서 어떤 참석자가 멜번의 문화유산을 활용하려는 태도는 응원하면서도 많은 옛 건물들이 폐쇄적인 사무공간으로 개발되어가는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도 보았다. GPO의 사례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만한 결과물일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GPO는 150년여의 시간 동안 갓난 도시의 랜드마크로 사랑받았다. 우체국일 시절에는 빅토리아 주 우편의 허브였고, 그 이후에는 세계화와 역사유산의 합작으로 다시 다듬어졌다. 세계적인 패스트 패션 열풍은 구시대의 유산에 디자인된 스펙터클을 더해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대중을 불러오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긍정적인 변화 뒤 편에는 역사 건축물의 외관을 보존하는 것 이상으로 GPO가 가진 사회문화적 맥락을 지속시키려는 고려들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