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주제 <정체성> ㅣ 임나무
매일 500 페이지를 읽습니다. 제가 글을 쓴다면 '카프카'처럼 쓰고 싶어요. 카프카를 읽으면 약간 푸르스름한 흑백영화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작가 프로필 ㅣ 임나무
취미가 독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엄청난 독서광.
자신이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나를 ‘인간’으로, 혹은 타인과 구별되는 ‘나’로 규정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는 뭘까.
살과 피, 독특한 얼굴 생김, 부모를 닮은 손과 발, 두뇌, 생각과 감정, 지식과 경험, 추억, 타인과의 관계망, 영혼.
‘정체성’이라는 단어가나에게 떠올리는 것은 오직 하나, 공각기동대뿐이다.
어제 공각기동대(Ghostin the Shell, 1995)를 다시보았다.
이번이 네 번째인지 다섯 번째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포착할 지점을 잘 알지 못했다.
사실 헐리우드 영화는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이 보아도 이해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 이건 좀 많이 달랐다. 처음엔 그냥 넋 놓고 보고 별 감흥 없이 지나갔다.
시나브로 일상이 흘러가는 중에 장면 몇 개가 생각의 그물에 더러 걸려들기 시작했다.
영화를 볼 때는 원시적으로 뭉쳐있던 것들이 마음 안에서 원심 분리되었다.
뒤늦게 현기증이 났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영화를 보았고, 또다시 보았고, 또다시 보았다.
영화 속 미래 세계에 인간은 두 가지의 대체 구조를 갖는다.
몸은 의체(pseudobody)로 변경 가능하며, 두뇌 속의 정보와 정신작용은 *전뇌화라는 기술을 통해 디지털화된다. 두 가지의 대체물은 교체나 공유가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로 인해 ‘인간’의 능력은 거의 무한 확장된다.
그러나 영혼(ghost)은 대체되거나 인공적인 생성이 불가능하다. 아니, 적어도 특정 개체가 스스로 영혼을 발생시켰다는 주장을 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간주되었다.
몸, 두뇌(지각), 영혼.
실존하는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의 요소가 모두 대체 또는 발생될 수 있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가?
나를 타인이 아닌 나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몸이 대체 가능하니 살과 피, 외모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적 구성품들은 나의 어떤 것도 규정하지 못한다. 원아웃. 두뇌는 네트워크와 공유되는 정보의 임시저장소일 뿐이고 심지어 개인의 추억, 감정도 해킹으로 조작된다. 투아웃. 어디까지나 암울한 미래를부각시킨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엔 이미 많은 기술들이 개발, 적용되는 중이다. 그리하여 이제 인간 능력의 영역은 확장 일로에 있고, 정체성의 영역은 소멸 일보 직전이다. 어쩐지 9회말 위기상황에 몰린 느낌이다.
이제 남은 희망은 오직 영혼뿐인가?
과연 영혼은 영화에서와는 달리 나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끝내기 홈런을 칠 수 있을까?
네트워크 상에서 스스로 영혼을 발생시킨 존재(인형사, the puppet master)의 등장이 그저 영화 속 상상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영혼에 의지하여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과학기술 선점에 대한 인간의 욕심과 경쟁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현실에서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인간 복제 실험도 결국 영혼 발생 실험이 아니던가.
영화 속에서 인형사는 자신의 자유의지, 생명체로서의 존재선언, 복사가 아닌 보존의 욕구 등을 드러낸다.
그의 의지와 욕구가 지극히 인간적인 나머지, 몸을 복제해내는 것보다 그 영혼의 자연발생이 더 소름이 돋는다.
이 시점에서 영혼 대신 내세울 만한 대타를 찾아보자.
굳이 찾자면 저항과 해체쯤 될까.
영화 내용을 가급적 밝히지 않으려 하지만, 두 명의 인물을 부득이 소개하기로 한다.
첫 번째 인물은 토구사.
그는 전뇌화와 의체화를거부하고, 인간의 육신과 독립된 정신세계, ‘가족’이라는 구시대적 소속집단을 가진 올드한 인물이다.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능력 확장 패키지’를 선택하지 않음은 무위의 저항에 가깝다.
아마 그는 죽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풍요로운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인물은 쿠사나기 모토코.
주인공이며 고도의 의체조종술을가진 전뇌화 된 여전사, 토구사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인물이다.
토구사가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저항을 선택한 반면, 이미 다른 지점에 서있는 그녀는 새로운 답을 탐색한다. 끊임없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번민했던 모토코의 답은 스스로 그 질문을 해체해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정체성을 질문하는 대신 다만 자신의 정체성을 흔적으로 세상에 남기는 것이다.
정체성과의 게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몸과 지각이 이미 나가떨어진 지금, 단 한 번의 기회일지도 모를 마지막 타석에는 누구를 세워야 하는 것일까?
영혼? 저항? 해체? 답은 게임이 끝나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야신(野神)이 필요한때다.
* 전뇌화를 가장 대중적으로 설명한 것은 아마 영화 매트릭스일 것이다.
목 뒤의 플러그를 통해 뇌와 컴퓨터, 타인의 뇌가 상호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기술 말이다.
일본 문화를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상당히 복잡다단하다.
특히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공식화되기 이전을 살았던 나로선,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음악, 잡지 등을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접하면서
죄책감과 신비감, 스릴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토토로, 논노, 라르크 앙 시엘, 에반게리온, 러브레터는 문화 게릴라끼리 통하는 일종의 암호 같은 거였다.
단순한 민족감정에 기반하여 배척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곤고한 세계관이 있었고,
헐리우드 영화들이 일본 감독들에게 오마주로 바친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한 작품들을 볼 때면,
오리지널은 배제된 채 짝통만이 허락된 불편한 외교적 현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외교나 감정, 현안 등의 모든 것을 차치하고 ‘공각기동대’는 분명 경외할 만한 작품이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1995년 극장판은 특히 그러하다.
1995년에 그려낸 미래상이 20년이 지난 지금은 손에 잡힐 듯이 구체화된 것도 소름 끼친다.
이 영화를 직접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영화 ‘제5원소’나 ‘매트릭스’를 보신 분이라면
간접적으로나마 ‘공각기동대’의 맛을 보신 것이니 제대로 된 원작을 일견 하길 강추한다.
이제 곧 헐리우드판 ‘공각기동대’가 나온다고 하고, 화제의 여주인공은 스칼렛 요한슨이 맡았다고 한다.
솔까, 제발 망치지나 말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