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안아주세요' ㅣ 화이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소설 '안아주세요' ㅣ 화이
희선은 거울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등과 어깨가 너무 많이 드러난다. 그 때 바이올렛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처음에 골랐던 게 더 수수하고 좋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노출이 많은 옷을 산 걸까. 아니, 사실은 모두들 경쟁하듯 더 화려하고 예쁜 옷을 고르는 분위기에 휩쓸렸던 거다. 다들 저렇게 입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때는 들었었다. 바이올렛의 핀잔이 귀에 거슬렸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또 블랙이야? 희선 언니 맨날 검정색 옷만 입는 거 알아요? 완전 무채색이야. 화장도 잘 안 하고, 너무 안 꾸민다니까. 그게 뭐야? 좀 더 화려한 걸로 사요. 최소한 등이라도 훅 파지던가..."
그래서 고른 이 드레스는 소매가 없이 끈으로 목 뒤에서 묶게 되어 있는 검정 원피스였다. 살짝 무게감 있게 떨어지면서도 부드러운 저지 소재가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실루엣이 여성스럽고 우아했지만, 희선은 드러난 어깨가 영 쑥스러워 귀걸이의 달랑거리는 큐빅만 만지작 거리고 있는 참이었다. 그녀는 바이올렛을 힐끔 쳐다봤다. 바이올렛은 그녀의 이름처럼 보라색 새틴에 레이스 리본 허리띠 장식이 있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상체와 리본에는 스톤이 장식되어 반짝거리며 빛난다. 하지만 희선의 눈에는 그 드레스가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생각되기만 했다. 그리고 어쩐지 땅고는 좀 더 무거운 톤이 어울리지 않나. 예를 들면 검정색 같은...
"우리 희선이 새로 산 드레스 잘 어울리네. 입술만 좀 빨갛게 바르면 이쁘겠다. 그런데 귀걸이는 좀 큰 걸로 하지 그랬어? 너무 눈에 안 띈다. 진작 말했으면 빌려줬을 텐데."
미영이 뒤에서 희선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녀는 오늘 파티를 위해 미용실에서 머리와 메이크업을 하고 왔다. 우아하게 틀어 올려진 머리에 반짝거리는 장식을 달아서 화려함을 한껏 강조하고, 흰색 꽃무늬 라인을 따라 반짝이가 달린 파란색 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세련되고 활달한 그녀와 잘 어울린다고 희선은 생각했다. 탈의실은 서로의 드레스나 헤어스타일을 칭찬하는 수다로 금새 시끌벅적해졌다. 희선은 다시 거울을 보았다. 심플한 검정 드레스에 한쪽 가르마를 타서 목 뒤로 가지런히 묶은 머리, 스톤이 하나씩 박힌 깔끔한 귀걸이와 목걸이, 마스카라만 강조한 메이크업...
"넌 참 블랙이 잘 어울려. 네가 입으면 검정색이 특별한 색이라는 걸 깨닫게 돼.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검정색 옷은 진짜 근사하고 섹시한 조합이야."
처음 잠자리를 하던 날, 재원이 말했었다. 그 날 이후로 희선의 옷장은 자연스럽게 검정색 옷들로 채워졌다. 화장도 한 듯 안 한 듯 은은하게만 했다. 블랙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되었다. 재원과 헤어진 이후에도 희선은 블랙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다른 색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화려한 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난 검정색이 좋은걸. 파티장으로 나가면서 희선은 혼자 중얼거렸다.
파티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연두색 쉬폰이 물결처럼 늘어진 천정에 예쁜 화환이 대롱거린다. 한쪽 벽에 현수막이 걸려있다. 땅고 빠라도스 7주년이라고 쓴 글 아래 춤추는 남녀의 실루엣이 남보라색과 핑크색 그라데이션으로 그려진 현수막이다. 테이블마다 번갈아 덮인 베이지색과 남색의 테이블보가 조명을 받아 새틴 특유의 은은한 광택을 낸다. 테이블 중앙에는 얼핏 보면 진짜인 것 같은 플라스틱 양초가 놓여 있었다. 건전지를 넣고 스위치를 켜면 램프에 불이 켜지고 불꽃 모양의 플라스틱 조각이 움직이면서 진짜 촛불이 어른거리는 듯한 효과를 낸다. 이런 건 어디에서 산 걸까? 동호회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어서 별별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장식 역시 회원들이 직접 준비해 온 것들이라고 했다.
희선은 동기들의 테이블에 앉지 않고 미영과 앉은 것을 곧 후회했다. 미영은 인기가 많았다. 희선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금새 춤 신청을 받았다. 희선을 돌아보며 미안하는 입모양을 했지만,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플로어로 나간 미영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연속해서 춤 신청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희선보다 아는 이들도 많고 경력도 오래되었으니 당연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갓 초급을 마친 두 달 경력의 희선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희선은 혼자 테이블에 앉아서 와인을 홀짝이며 사람들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티는 성황이다. 동호회 자체 규모가 꽤 큰 덕분에 파티장에는 300여 명의 인원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모두들 남 녀 할 것 없이 화려한 의상과 화려한 악세사리로 치장하고 서로 인사하고 웃고 떠들고 춤을 춘다. 지난번에 가 봤던 밀롱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뭐랄까, 밀롱가는 좀 더 끈적끈적하고 밀도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여기에서의 땅고는 가볍고 유쾌하다고 할까.
"왜 혼자 있어? 동기들 다 어디 가고?"
돌아보니 새벽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밝은 갈색의 곱슬머리와 잘 어울리는 초콜렛 색의 양복을 입은 그가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인다고 희선은 생각했다. 넥타이 대신 단추를 두개쯤 풀어놓은 옅은 핑크색의 셔츠가 까무잡잡한 그의 피부와 잘 어울렸다. 핑크는 전형적인 여자의 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남자가 이렇게 핑크색이 잘 어울리는데다가 그게 더 남자답게 보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 새별쌉. 다들 저 쪽 다른 테이블에 있어요. 전 미영이 쫓아왔다가...."
희선은 말꼬리를 흐리며 멋쩍게 웃었다.
"캔디가 혼자 버려두고 춤추러 가버렸구나? 캔디도 매정하네. 친구를 버려두고..."
새벽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희선의 옆자리에 앉았다. 희선은 기분이 복잡했다. 새벽별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게 설레고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왜 그가 자신에게 상냥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옆에 있을 때는 참 자상하고 따뜻하고, 마치 희선이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지나가면서 의례 한 마디씩 귓속말을 던지기도 하고, 동기들이 선물한 작은 초콜렛이나 캔디 같은 것을 남들 몰래 희선의 손에 살짝 쥐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짐짓 모른 체 하는 듯했다. 그 흔한 카톡 메세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저 제자로서 예뻐하는 건가? 미영 친구라서 챙겨주는 걸까?
음악이 바뀌었다. 갑자기 새벽별이 희선의 손을 잡았다. 희선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이렇게 이쁜 게 하고 왔는데 혼자 벽꽃 하고 있기는 아깝잖아. 기왕에 파티에 왔으니까 한곡이라도 춰야지?"
새벽별이 웃으며 희선을 일으켜 세웠다. 이쁘다는 말에 희선은 가슴이 뛰었다. 새벽별과 함께 춤을 추기를 얼마나 고대했었는지, 너무 기뻐하는 걸 들킬까 봐 희선은 입술을 꽉 물었다. 플로어로 이끄는 그의 손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새벽별의 오른손이 희선의 왼쪽 등을 감싸 안았다. 아, 거긴 맨살인데, 아침에 샤워하면서 보습크림이라도 꼼꼼하게 바르고 나올걸 후회했다. 그의 왼쪽 팔을 잡으니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긴장된 맘에 숨을 크게 들이쉬자 톡 쏘는 우디향의 경쾌한 향수 냄새가 코 안으로 파고든다. 심장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수업도 다 끝났는데, 오빠라고 불러."
희선은 등의 솜털이 일어나는걸 느꼈다. 가슴이 울렁거려 어지러웠다. 시선을 떨구자 운동으로 잘 가꿔진 탄탄한 가슴이 바로 코 앞에 있다. 두근거림이 점점 빨라진다. 그의 리드는 상냥했지만, 희선은 자신이 무슨 동작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신경이 쓰였고, 춤을 추는 동안 몇 번 스텝이 엉켜서 당황스러웠고, 그러니까 심장은 더 널뛰고, 새벽별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것조차 민망스럽기만 했다. 희선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숨을 안 쉬면 마치 심장 뛰는게 가라앉기라도 할 것 처럼.
"괜찮아? 얼굴이 빨개졌네."
"아, 아마 와인 때문인가봐요. 죄송해요. 저 바람 좀 쐬어야겠어요."
희선은 허둥지둥 파티장을 빠져나와 테라스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희선은 사람들을 피해 테라스의 구석으로 가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초가을의 밤바람이 달아오른 볼을 간지럽힌다. 아직도 귓가에 그의 속삭임이 맴도는 것 같다. 오빠라고 불러, 오빠라고... 등에 닿았던 그의 손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등에 솜털이 돋는다. 둥글던 바람이 차츰차츰 날을 세우며 드러난 어깨와 등을 때린다. 달아 오른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자마자 후회가 몰려왔다. 바보같이, 왜 허둥지둥 도망쳐 버린거람, 새벽별이 당황했을 텐데... 내가 거부했다고 생각하고 나한테 관심이 멀어지면 어쩌지. 게다가 어휴, 왜 그렇게 허둥댔을까. 처음 같이 춤 춘건데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느끼면 어쩌지. 왜 거기서 멍청하게 딴 생각을 하다가 리드를 놓쳤을까, 바보같이 스텝이 엉켜 버렸잖아. 아마 나랑 추는 게 재미없었을 거야. 아아, 한심해. 다시 새벽별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희선은 바람의 한기를 느끼면서도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혔다. 그때 미영이 테라스로 나왔다.
"희선아, 너 여기서 뭐해? 괜찮아?"
"응? 아, 난 괜찮은데, 왜?"
"새별 오빠가 너 여기 있다고,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가 보라고 그러던데."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희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치미를 뗐다. 미영에게 얘기해 봐야 놀림만 받을 것 같았다. 오빠라는 호칭도, 사람들에게 다정한 것도, 미영에게는 익숙한 풍경일 테니까. 하지만 희선이 느끼는 묘한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쩌면 정말 희선의 착각일지도 모르니까 더더욱 입 밖으로 내보이기 싫었다.
"아냐. 와인 마신 게 좀 취하는 것 같아서 바람 쐬러 나왔어. 이제 좀 깬 것 같다."
"그래? 정말 괜찮은 거지? 그럼 들어가자. 곧 공연 시작할 것 같아."
그제서야 미영은 표정을 풀고 희선의 팔짱을 끼었다. 희선은 미영을 따라 홀로 들어가면서 혹시라도 새벽별이 자기를 보고 있을까 봐 희선은 차마 눈을 들어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영을 보낸 거 보면 나를 걱정하고 있는건가 봐.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플로어를 비켜 벽 쪽으로 빙 돌아 반대방향 테이블까지 가는 동안 희선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미영이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희선을 종종 옆에 멀뚱이 세워 놓았지만, 희선은 전혀 어색하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잠시 미영이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마리가 희선을 보고 반갑다는 듯이 다가왔다. 마리는 동기중에 유일하게 희선과 동갑내기여서 비교적 서로 허물없이 대하고 있는 사이다. 예쁜 닉네임과는 다르게 거침없는 입담과 남자같은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그녀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다섯 마리이고 자신의 성도 오씨라고 닉네임을 마리라고 지었다고 했다. 동기들 사이에서 소식통을 자청하고 있어서 늘 어디선가 들은 여러 가지 소문이나 정보를 알려주곤 하던 그녀가 어김없이 희선의 귀에 속삭였다.
"저 여우같은 기집애."
"응? 누구?"
"누구긴 누구야? 바이올렛이지. 봐봐. 늘 바이올렛이랑 새벽별 싸부님이랑 춤춘다니까."
마리는 살짝 비꼬듯이 싸부님이란 단어를 힘주어서 말했다. 희선은 그제서야 플로어를 쳐다 봤다. 새벽별이 바이올렛과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이올렛의 보랏빛 레이스가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새벽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 있는 걸 보고 희선은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아까와는 다르게 쿵쾅거렸다.
"그거 알아? 쟤 마이클한테도 그렇게 아양 떨면서 어장 관리하잖아. 그러면서 새별쌉한테도 얼마나 작업 거는지 몰라. 춤 잘 추지, 핸섬하지, 인기 있지, 그러니 놓치고 싶겠어? 벌써 둘이 몇 번 따로 만났다는 소문도 있어. 사귀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야. 마이클만 속 타겠지 뭐야."
희선은 갑자기 찬 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마리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묻고 싶은 충동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리는 희선의 기분 같은 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그저 흥미 있는 가십거리인 양 신이 나서 떠들었다. 수다를 끝낸 미영이 옆으로 오자, 그녀는 눈을 찡긋하고는 가 버렸다. 희선은 미영을 따라 테이블에 앉으면서도 마리가 한 얘기만 머리 속에 꽉 차 있었다. 축하 행사가 시작되어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땅고 빠라도스의 연혁과 소개를 시작했지만, 희선은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붙임성 좋고 애교가 많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도 제법 많았다. 희선에게도 그 특유의 사근사근함으로 언니 언니 하면서 살갑게 굴었다. 희선은 차마 바이올렛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녀와 삼각관계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잠깐.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닌가? 새벽별이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건 맞지만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걸. 바이올렛과도 사귀는 건지 아직 확실하지도 않고... 하지만 춤추면서 저렇게 웃는 걸 보면 새벽별도 바이올렛을 좋아하는 걸지도...
갑자기 사람들의 환호성에 문득 정신이 들어 쳐다보니, 땅고 빠라도스의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초대된 전문 땅고 커플의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 이 와중에 공연이 문제야, 희선은 무심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검은 양복에 검정 셔츠, 보라색 넥타이에 검정 구두를 신고 있었고, 여자는 어깨가 드러나고 상체에 꼭 붙는 검정색 뷔스띠에와 긴 절개가 있는 검정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굵은 초크 느낌의 목걸이와 굵은 팔찌가 반짝였다. 저 사람들도 블랙이네, 하고 희선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행사장이 꽤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커플은 아주 작게 보였다. 희선의 눈에는 그저 검은 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희선은 마법에 홀린 듯이 그 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커플은 가슴을 꼭 붙인 채 서로 안고 있는 상태에서 주로 음악에 맞춰 걷는 동작으로 춤을 췄는데,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검은 강물이 한 번도 멈춤 없이 흐르며 이어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동시에 무겁고 중후하기도 했다. 어느새 그들은 거인처럼 커져서 마치 카메라를 줌 인 해서 가까이 들여다보는 듯 바로 눈 앞에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숨 쉬는 호흡 하나까지 다 볼 수 있었고, 그녀의 긴 속눈썹이 깜박이는 순간에는 홀 안의 공기가 출렁거렸다.
걷는 동안 그녀의 발은 마치 붓으로 플로어에 그림을 그리듯 움직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고무공을 튕기는 듯한 경쾌한 발놀림으로 음악의 리듬을 타기도 했다. 음악이 고조되면서 남자가 에너지를 상승시킨다 싶었는데 그녀의 몸이 고무로 된 양 뒤틀어지면서 허공에 리본체조를 하듯 다리를 휘둘렀다. 그녀의 구두가 발의 라인을 따라 반짝거림의 여운을 만들어냈다. 그가 그녀의 주위를 점점 넓게 빙빙 돌자, 그녀는 중심축이 기울어지면서 한쪽 다리로 넓게 원을 그렸다. 희선은 마치 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몸은 음표 같았다. 아니, 바이올린의 애절한 선율이었다. 콘트라베이스의 웅장한 박력이었다. 희선은 자기도 모르게 울컥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땅고를 저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지?"
한참 클라이막스를 달리던 음악이 갑자기 멈추던 순간, 그들은 갑자기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희선도 동시에 숨을 헉 들이쉬었다. 그들은 멈춰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영화 매트릭스의 장면처럼 공중에 뜬 채 느릿느릿 조용히 이어지는 음악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서로를 꼭 안은 채로 그들은 그렇게 조용히 춤을 마무리 지었다.
공연이 끝났다. 희선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와, 진짜 잘 춘다. 그치 희선아? 응? 뭐야, 너 울었어? 공연 때문에? 진짜?"
미영은 그런 그녀를 보고 놀리듯 웃었다. 미영은 말은 대단하다고 하지만 희선처럼 그리 큰 감흥을 받지는 않았나 보다. 내가 유난한 건가. 어쩐지 민망해진 희선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공연을 마지막으로 축하 행사가 끝나서 그런지, 계속 남아서 춤을 출 사람과 더 늦게 전에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분위기에 홀은 어수선했다. 테이블 사이를 지나가는데, 누군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큰 가방으로 희선을 밀쳤다. 하필 옆에 있던 의자의 다리에 걸리면서 희선은 기우뚱했다. 넘어지는구나 생각하고 눈을 꼭 감았다. 그때, 누군가가 희선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요?"
"네, 아, 고맙습니다."
그 와중에도 희선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켰을까 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인사를 했다. 그때, 그가 손수건을 불쑥 내밀었다. 낯익은 커다랗고 뽀얀 손이다. 그가 말했다.
"저도 울었어요."
뜻 밖의 말에 희선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머쓱하게 웃는 그의 가지런한 이가 보인다. 닉네임이 줄리앙이라고 했던가. 그의 얼굴 역시 상기되어 있었다. 은색 안경테 너머로 보이는 눈가가 불그스름한 걸 보니 울었다는 말이 진짜인 것 같다. 희선은 어쩐지 반가웠다. 나만 바보 같았던 게 아니구나. 문득, 얼굴이 엉망일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가 내민 푸른색에 흰 체크가 그려진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누가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줄리앙이 희선의 생각을 눈치챈 듯 말했다.
"좀 웃기죠? 그래도 손 부끄러우니까 써 주세요. 저희 아버지가 손수건은 여자를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거라고 하셨는데, 진짜로 이렇게 쓰게 될 줄은 저도 지금까지 몰랐네요."
희선은 손수건을 받았다. 뺨의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지만 혹시라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을까 봐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 밑을 닦았다. 손수건을 보니 검정색의 무언가가 묻어 나왔다. 아뿔싸, 마스카라! 줄리앙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아무래도 거울을 보셔야 할 것 같네요..."
"네, 아무래도 다녀와야겠어요."
희선은 목인사를 하고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눈물에 마스카라가 번져서 팬더마냥 눈 밑이 시커멓다. 뺨에는 눈물이 흐른 자국이 선처럼 남아 있다. 오늘 왜 이렇게 망신스러운 일들만 줄줄이 벌어지지. 희선은 쓸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얼룩진 화장을 수습하면서 희선은 그의 손수건을 아직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 손수건 빨아서 드릴게요."
"어, 제 손수건으로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눈이 동그랗게 커진 희선을 보며 그가 하하 웃었다.
"농담이에요. 손수건은 그냥 주세요. 제가 빨면 돼요. 대신 우리 춤 출래요?"
"지금요?"
"춤추고 싶어서 도저히 못 참겠네요. 좀 전에 무지 감동받았잖아요, 우리... 잊어버리기 전에 몸에 넣어두고 싶거든요. 마침 공간도 여유가 있어져서 용기를 내 보려구요."
희선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그는 춤을 청한 이유를 늘어놓았다. 재미있는 사람이네, 하고 희선은 생각했다. 파티장을 둘러보니 그의 말대로 제법 많은 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듯 플로어가 전보다 한산해졌다. 초보들이 춤을 추기에는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미영은 이미 춤 신청을 받고 어디선가 놀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다.
"좋아요, 같이 춰요."
그의 손은 따뜻했다. 희선의 손이 그의 커다란 손 안에 푹 쌓인 것 같았다. 손이 따뜻하면 마음이 차갑다던데, 정말일까? 난 손이 차가운 편인데 그럼 난 따뜻한 사람인가? 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이 사람도 차가운 사람이 아니겠지. 하지만 그의 리드는 형편없었다. 제멋대로였고, 가끔은 배우지도 않은 동작을 즉흥적으로 만들어서 하는 듯 예상할 수 없는 춤을 추었다. 하지만, 희선은 즐거웠다. 두 사람은 발이 부딪히고 스텝이 엉키면서도 키득거리며 춤을 추었다.
"저는 아까 그분들한테 강습받으러 가 보려구요. 같이 갈래요?"
"정말요?"
"아무래도 혼자 가는 거 보다 같이 가면 덜 어색하고, 같이 출 파트너가 있으면 좋잖아요."
"언제요?"
"음, 지금부터 알아봐야지요."
그는 얌전해 보이는 모범생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활달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지만, 그와는 성별 상관없이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도 잘 통하고 같이 있으면 편한 그런 사람, 2년 전 재원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결국 사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었지만... 아냐, 그는 재원과는 달랐다. 일단 재원처럼 세련된 남성미가 흐르지 않는다. 남자로서는 새벽별이 훨씬 매력적이지, 이 남자는 전혀 아니다. 설레는 느낌도 없고, 긴장도 되지 않고, 이런 사람과 연애를 할 리가 없잖아? 희선이 대답했다.
"그럼 같이 가봐요. 언제 어디서 하는지 알아보고 말해줘요."
희선과 줄리앙은 춤을 계속 이어갔다. 내가 이 남자에게 빠지는 일은 전혀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상처받을 일도 없을 거라고 희선은 생각했다. 그가 몸을 휙 돌리자 희선의 발이 플로어에 그림을 그리듯 출렁였다. 아까 본 댄서의 화려한 발동작이 떠올랐다. 앞으로 그들에게 배우게 된다고 생각하니 희선은 마음이 설레였다. 그러고 보니 그들 역시 검은 드레스를 입었었지. 역시 땅고는 블랙이 어울려. 천정의 샹들리에가 벽에 붙은 거울에 비쳐 반짝거렸다. 그 아래로 줄리앙의 베이지색 면바지와 희선의 검은 스커트가 빙글빙글 도는 게 보인다. 희선은 비로소 자신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