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나는 남한의 게릴라이다.

공통주제 <정체성> ㅣ 재키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11 오후 4.24.55.png 직업 유랑자


1997년 pc통신이 한창 흥하던 시절 저는 대학 1학년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방제는 <음악/영화/책 이야기하실 분 오세요~~(1/10)>였습니다. 채팅방에 찾아온 사람들과 진지하고 순수한 대화를 많이 나눴고 그때 알게 된 사람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기도 합니다.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쉬운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바로 정체성이 아닌가.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써보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볼 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본다. 어쩌면 잘 모르는 사람을 파악할 때 그 질문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입구인 것 같다. 사실이다. 학생이면 무슨 과 다니냐고 물어볼 거고, 직장인이면 어떤 분야 어떤 일을 하냐고 물어볼 것이다. 그 사람의 업은 그 사람의 정체를 대변하는 간판이다. 가게의 간판을 보면 무슨 가게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 책 읽고 글 쓰는 이들에게 그 가게의 간판이 그 가게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면 조금 기분이 언짢다. 커피숍이라도 다 똑같은 커피숍이 아니라 동네 커피숍일 수도 있고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 일수도 있고 혹은 전문 바리스타가 있는 특정 커피 전문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커피숍의 분위기와 주로 나오는 음악과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커피숍의 정체도 달라질 수 있다. 아마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본다면 전체와 개별성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어떤 사회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 몇 살인지 어떤 공부를 했는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각자 고유의 가치관과 취향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간략하게 이 시대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나의 정체성과 스스로 생각하는 나 자신의 개별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1978년 생이다. 초등학교 때 88 올림픽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 고등학교 때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고 IMF 때 군대로 피난 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 될 때 영화일을 할 당시였는데 CF 촬영 알바 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소식을 듣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술자리에서 대통령을 마음껏 깔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명박에게 속아(사실은 무지몽매한 내가 언론에 속은 거였겠지) 경제가 살아날 줄 알았다. 알고 봤더니 엄청난 대도였다. 내 안에 있는 마음의 갈등에만 휘둘리던 시절을 지나 사회에 대해 눈뜨고 정치에 눈뜨기 시작하자 내 정체성에 대해 다른 시각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 자신의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안에서의 문제이고 구조적 문제 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깨달아가기 시작했던 거다. 정권이 바뀔 거라는 기대를 안고 2012년 대선 결과를 앞두고 홀로 영화를 봤다. ‘레 미제라블’이었다. 영화 내용 속 혁명의 장면에서 피가 끓기 시작하고 기대를 하며 극장 문을 나왔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충격과 참담한 마음으로 터벅터벅 귀가했던 기억이 난다. 이해할 수 없었고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더라. 언젠가부터 나는 스스로를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잘하면 되지 뭐. 내가 피해만 입지 않으면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무슨 상관. 이러면서 살았는데 뉴스에서 ‘그녀가’ 나와 이야기하는 꼴을 보면 속이 뒤집어지고 들리는 소식들에 참담한 기분이 들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닌 거다. 이건 정말 아닌데…싶은 나날들을 꿋꿋이 참고 눈 앞의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 일을 하다가 대학교 1학년생을 만났다. 컴퓨터 공학과란다. 나는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에 조금 놀랐다. ‘학생. 공부 열심히 해서 선진국에 취직해서 이 나라 벗어나는 게 답이야. 대한민국 살기 힘들어. 알지?’ 씨발 지금 생각해보니 참 서글픈 이야기다. 그냥 대학 때는 공부도 좋지만 실컷 놀 수 있을 때 놀라고 해줄걸……...

이러한 현실에 살고 있는 나의 정체성은 월급 노예. 월급을 받기 위해 한 달을 꾹 참고 버틴다. 물론 비전이 있는 일이기에 붙어 있기는 하지만 월급을 받기 위해 때로는 내게 부당한 취급을 하는 직장 상사에게 대들지 못하고 그냥 눌러 참고 버틴다. 지랄 맞은 고객들도 그냥 아무 말 못 하고 받아준다. 이렇게 사는 게 참 싫지만 버티는 이유는 월급 노예.

나는 음악을 참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해서 꽤 많이 봤고 책도 좋아해서 할 이야기도 많다. 탱고도 추고 살사도 추는 댄스 동호인이고 운동도 무엇이든 자신 있는 스포츠맨이다. 내 사생활에서 아쉬운 것은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할 연인이 없다는 것 정도인데 인연은 다 정해져 있다고 믿고 언젠가는 만날 거라 위로하며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며 잘 지내고 있다. 누구에게도 삶의 만족도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정체성의 큰 범주인 이 나라의 돌아가는 일과 이 대한민국 사회에 대해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족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겠지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 같다.

술자리에서 사회 비판을 하다 보면 결론은 늘 한결같다. '이 나라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길은 게릴라처럼 사는 것이다.’ 개인이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연대하고 위로하고 작은 힘이나마 서로 보태가며 버티며 사는 거.


슬프지만 그것이 나와 이 나라와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정체성인 것 같다.

갑자기 체 게바라 평전을 다시 읽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4화. 우먼 인 블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