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누는 대화 | 임나무
매일 500 페이지를 읽습니다. 제가 글을 쓴다면 '카프카'처럼 쓰고 싶어요. 카프카를 읽으면 약간 푸르스름한 흑백영화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작가 프로필 ㅣ 임나무
취미가 독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엄청난 독서광.
자신이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3월 들어서부터 아이들과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도서관에 가고 있다.
그곳에는 내가 몇 년 전 대안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제자 하나가 매일 온다.
올해 수능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다.
귀여운 토끼같았던 초딩 5학년 때 처음 만난 그 아이가벌써 입시생이라니...
아이는 빨리 자라고, 나는 더 빨리 늙고 있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입시준비가 온통 자기 몫이라 돈이 꽤 많이 들 법도 한데
부모님 형편 생각하느라 학원도 다니지 않고,
아침마다 두 끼 도시락을 혼자 싸고 도서관에 나와 인강을 들으며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한다.
요즘은 넷이서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고 얘기도 하며 잠긴 목소리를 풀고 있다.
며칠 전 점심때 공부는 어떤지 물어봤는데 하필 영어가 제일 힘들다며 헤헤 웃길래
고딩들이 보는 vocabulary 책을 한 권 사주고
유효기간 다 지난 해묵은 공부법 몇 가지를 알려주곤 괜히 안스러웠었다.
무엇보다도 밥 먹는 시간 20분씩 말고는 자리 한 번 뜨는일도,한눈 한 번 파는 일도 없는 그 아이가
과연 이 지독한 1년의 싸움 끝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걱정이 되었다.
토요일인 어제도 도서관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영어는 좀 할 만하냐?"
"음... 여전히 어려운 건 어려워요. 근데..."
잠깐 머뭇거리다가 아이가 말했다.
"입시라고 생각 안하려고요. 제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열심히 하다가 혹시 안 되면…
1년 다시 한대도 괜찮을 것 같애요."
요즘은 학원에서 "객관식 문제에서 00이라는 단어가 든 지문은 무조건 그게 정답"이라 알려준다고 한다.
믿기 어렵지만 영어 한 줄 없는 영어 문제집도 있고, 단어나 문법을 몰라도 1등급을 받는 비법이 있단다.
아이도 바깥 세상이 그런 족집게 공식과 필살의 비기들로 넘쳐난다는 건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란 것이 너무 아쉽다면서도
"그렇게 공부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쟎아요. 여태 못했던 공부 맘껏 한다치고 제대로 하고 싶어요." 한다.
고개를 끄덕끄덕... 네 말이 맞아, 했다.
원래 그런 아이였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데,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하나를 두 시간 내내 붙들고 앉아서 비명을 지르며 기어코 풀어내고 마는 아이였다.
나에게도, 다른 선생들에게도 쉽게 가는 길을 물어온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랬던 아이가 지금, 오직 결과만이 전부인 살벌한 입시 전쟁터에홀로 서 있다.
덩치 큰 남자아이들이 위협적으로 질주해 들어와도 온몸으로 공을 낚아채던 겁없는 골키퍼 소녀가,
세상이 만들어놓은 필살기들 앞에서 애써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저도 버거운 탓인지, 여느 입시생들과는 다르게 얼굴이 말라가고있다.
그러나 세상의 잔인한 영리함은 순진하고 진부한 이 아이의 골문을 자비심없이 철저히 유린하고도 남으리라.
일생일대의 도전인데, 이럴 때조차 아이에게 영악해지라고 말하지못하는 나다.
아니, 나 자신도 그런 요령에 끝내 익숙해지지못하고 있다.
그러니 갈 길 바쁜 입시생에게 voca 책같은 걸 안겨줬겠지.
그러나 나는 언제나 고루한 정공법만 말하고, 아이도 그것 외엔 듣지 않을 것임을 서로 오랫동안 보아왔으니,
설령 우리 앞에 2016년 수능 문제가 예언처럼 주어진들, 나도 아이도 그냥 눈을 감고 말 것이다.
우리에겐...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제자의 저 싸움은 어떻게 결말이 날까.
여태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 살았던 인생에 누적된 패배들을 밟고 서서
옛 제자를 바라보는 선생의 마음이 착잡하다.
이 시대를 하염없이, 일관되게 패배하고 있는 내가,
어쩌면 통한과 자괴감만이 기다리고 있을 길을 뒤따라오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변명은 단지,
우린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는 막연한 연대 선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싸움이 아이에게 잔혹동화가 아닌 판타지로 끝나기를 열망한다.
입시를 '배움'이라고 착각하는 천진한 소녀가 내년엔 동네 도서관 말고 대학에서 20대를 시작할 수 있기를.
아마 이 아이라면 대학시절을 온전하고 충만한 성장의 기쁨으로 채울 수 있을텐데.
그러면 나도 이렇게나 틀어져버린 세상과 조금은 화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일은 아이가 먹고 싶다던 돈가스 김밥을 넉넉히 말아가야겠다.
아닌 것은 끝내 아닌, 우리들의 전투식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