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누는 대화 | 임나무
매일 500 페이지를 읽습니다. 제가 글을 쓴다면 '카프카'처럼 쓰고 싶어요. 카프카를 읽으면 약간 푸르스름한 흑백영화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작가 프로필 ㅣ 임나무
취미가 독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엄청난 독서광.
자신이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책 속의 인물들을 대화 상대로 삼는 글을 쓰다 보니 당황스런 난제가 하나 생겼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도 아니고 바로 눈 앞에 나와 대화하는 대상을 지칭할 제대로 된 말이 없다는 거다.
요즘 내가 떠올린 인물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페스트(알베르 카뮈)'의 베르나르 리유, '모비 딕(허먼 멜빌)'의 스터벅, '양철북(귄터 그라스)'의 오스카.
나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상대방을 뭐라고 지칭해야 할까?
몇 번을 쓰고 지우면서,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스터벅, 너는..."
"항해사님, 당신은..."
아... 둘 다 이상해...
모국어를 지극히 사랑하지만, 도대체 변명해줄 수가 없는 한 가지 결함을 고발해야겠다.
2인칭 대명사, 2인칭 호칭의 빈곤! 너를 고발한다!
나는 배우자 아닌 사람에게 '당신'이라는 호칭을 남발하는 소설과 드라마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쓰이지 않으니까.
3인칭을 그, 그녀라고 하는 것처럼 '당신'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아마 영어의 영향이라지.
실제 세상에서 아무에게나 '당신'이라는 말을 썼다간 뺨 맞을 지도 모른다.
혹은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싶은 사람에게나 그 단어를 쓰기도 한다, 삿대질과 함께.
막상 우리가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부르는가 생각해보니, 사실은 이렇다.
동년배, 나이 어린 이들과 말을 트기로 합의된 상태라면 일단 '너, 자네'다. 가장 간단하다.
배우자에게는 '자기, 자네, 당신'을 쓴다.
아, '자기'는 여인네들끼리는 손아래 사람을 부르는 말로도 쓴다.
그 외엔?
"선생님, 선생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부장님 일찍 오셨네요."
"엄마가 나한테 어제 그렇게 말했쟎아."
"내가 형한테 사줬던 바지 좀 빌려줘."
"스타일이 바뀌셔서 탐정님을 못 알아봤어요."
See?
우리네 2인칭은 죄다 '나와의 관계' 혹은 '직업', '이름이나 닉네임'으로 대체되어 있다.
비겁하게도 3인칭에 기대어 부르는 것이다.*
막상 그렇게 직업이나 관계의 3인칭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부르고 나면,
그 사람과의 대화는 그 호칭의 범위 안에서만 맴돌 뿐이다.**
그렇다면 나와 아무 관계가 없거나 직업, 신분,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손윗사람이나 이성은 어쩔 테냐 말이다.
다들 아저씨, 아줌마로 부를 수도 없고.
한동안 나는 '저기요'로 호칭되고 '2인칭'으로 지목되지 않은 채 살았던 적이 있다.
내가 서른 즈음에 다니던 교회는 너무 작은 개척교회라서 교인들 연배가 띄엄띄엄했다.
아예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거나, 아니면 스물 갓 넘은 청년들이었다.
윗분들은 나에게 '자매~ 자기~'하며 호칭하고, 그것으로 2인칭을 삼았다.
"자매, 자기가 오늘 대표기도 좀 할래?"
요런 식이다.
그러나 나이 어린 청년들은 자신들과 한 무리로 섞어주고 싶지 않은
열 살 차 기혼녀인 나에게 마땅한 호칭을 주지 않았다.
나와 나의 남편은 직분도 없고, 청년도 아니며, 청년들과 형제지간도 아닌 유일한 30대였다.
그래서 나는 '저기요' 였다.
아이가 생기니 아예 대놓고 '00어머니'라고 불렀다.
부르기는 대충 그렇게 불러도, 나는 그들에게 결코 2인칭이 될 수 없었다.
"00어머니, 오늘 식사 (you가 - 이건 손짓으로 대체한다) 당번이신가요?"
"저기요, 이번 목장 모임은 (your - 이것도 손짓으로 대체한다) 댁에서 하는 거죠?"
대화 상대로서의 존재감이 소거된 그 애매하고 거슬리는 상황은,
내가 젊은 청년들에게 '저기요'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목사님이
우리 부부에게 집사 직분을 주시면서 해결되었다.
(사실인즉 순전히 그 문제 때문에 직분을 주신 거라고 하면 다들 믿으려나?)
이제 대놓고 부를 '신분명칭'이 생겼고,
청년들은 나와의 대화에서 안전거리를 확보하여 안도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행여라도 내가 '누나라고 부르라'는 식으로
그들이 원치 않는 친밀한 2인칭 호칭을 지정해줄까봐 몹시 긴장하는 내색이 역력했으니.
요즘도 그 시절의 깊은 빡침이 되살아나곤 한다.
어떤 이름으로든 상관없으니 그냥 '2인칭으로 불리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차마 말로 요구할 수 없는 옹색하고 치졸한 문제라서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만,
대화에 존재하지 않는 나의 호칭은 상당히 씁쓸한 자존심의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간혹 누군가와 얘기할 때면
상대방을 제대로 된 대화상대로서, 존중과 예의를 담아 부르고 있는지 점검하곤 한다.
그러면서 우리말의 빈곤함 앞에 나 자신조차 갈팡질팡할 때가 많은 것이다.
하이데거가 그랬댔나, "sein 동사가 없는 언어로 어떻게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있어서는 진심 이렇게 묻고 싶다.
"제대로 된 you가 없는 언어로 어떻게 소통할 수 있단 말인가?"
김춘수 시인이 이름을 불러 '꽃'으로 만들어 주기 이전부터 거기엔 '너'라는 호칭이 있었다.
세상 누구든지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2인칭을 원한다.
그러고 나서야 꽃으로 만들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닌가.
* 이 부분은 글을 검토해주신 마음탐정님이 주신 멋진 표현을 빌려왔습니다.
** 이 부분은 글을 검토해주신 해원님의 기막힌 통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