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누구냐 너?

3월 공통주제 <정체성> ㅣ 신정훈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1-15 오후 4.46.44.png 호주 멜번의 청소부
저는 글을 막 씁니다. 브레인스토밍하듯 손가락 가는대로 놔두는 식입니다.


작가 프로필 ㅣ 신정훈

현상을 쿨하게 응시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즉흥적인 글쓰기 과정으로 풀어내려 한다.




"누구냐, 너?"


자신을 15년 동안 감금하고 군만두만 먹인 범인과의 대화에 오대수가 꺼낸 첫마디다.

"형, 저 여자친구 생겼어요." "누구야?" 같은 질문이지만 감정의 깊이가 다르다. 오대수만큼이나 복잡한 감정으로 자신에게 "누구냐 너"'라는 대사를 건넨다. 하루 24시간 가까운 곳에서 단서를 뿌리지만, 실체를 알려주지 않는다. 알고 싶다. 30년 동안 정답 없는 질문만 건네는 나라는 사람. 정말 누구세요.


여자친구는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즐거운 대화를 위해 관련 책 몇 권인가를 읽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았다. 멜버른은 예술을 사랑하는 도시답게 매일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전시회가 열린다. 고상한 그녀에 맞춰 자주 전시회를 찾는다. 어쭙잖은 지식으로 전시회를 갈 때마다 현대미술, 고전 미술 가리지 않고 분석한다. 여자친구는 작품에서 뭔가 찾아낼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핀잔을 준다.


"음, 색채가 강렬하며 역동적이고 윤곽선이 명확하지 않은걸? 신화적 소재가 아닌 걸 보니 18, 19세기 무렵에 그려진 작품으로 낭만주의겠어. 인상주의와 더불어 특히 흥미로운 사조지."

"르네상스인데?"


오전에 일본 고전 영화, 1964년 작인 모래의 여자를 봤다. 50년이 지난 시점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위 사례와 같은 맥락에서 언젠가부터 예술작품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진짜 메세지를 찾기 위해 애쓴다. 은유와 몽타주 뒤 작가의 의도를 얼마만큼 파악하는지가 지적 역량을 드러낸다 믿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되고픈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런 당위성을 토대로 '작품성이 높다'라고 언급된 것들엔 촉각을 곤두세운다. 영화 모래의 여자도 그 범주에 속한다. 원론이나 미술사를 통한 지식과 직관이 비례하지 않아 회화에선 민망함을 무릅써야 했지만, 문학과 영화에선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어폰을 끼고 눈을 크게 떴다.


2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주인공은 학교 선생님으로 곤충채집에 관심이 많다. 희귀 곤충을 학회에 보고해, 명성을 얻어 자아를 실현하겠단 인물이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과 올바르게 물리지 않지만, 많은 이들의 실제 모습이 아닐까?. 주인공은 눈부신 미래를 위해, 희귀 곤충이 있을지도 모르는 사막 마을을 방문한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이익을 위해 구덩이 속에서 모래를 퍼담을 사람이 필요하다. 주인공은 좋은 먹잇감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속아 모래 구덩이 속 낯선 과부의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되고,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저항이 의미 없는 그곳에서 강제 노동을 요구받고 자신이 혐오한다는 원숭이의 삶을 살게 된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환경에 적응하고, 여자와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는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한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가 출산을 목전에 두자,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윗세상으로 데려간다. 여자의 산통이 심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사다리를 챙기는 것을 잊어버리고 황급히 발길을 옮긴다. 덕분에 주인공을 꿈에 그리던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영화 전반에 걸쳐 바다를 보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던 그답게, 먼저 마을의 바다로 향한다. 바다 구경이 끝나자 그는 사다리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주인공의 독백으로 영화는 끝난다. "나중에도 나갈 수 있으니 일단은 좀 더 머물자"


영화는 최근 고민하고, 토론했던 주제를 다시 점화시켰다. 인간과 시스템 (사회 구조)의 역학관계인데, 얼마나 시스템에서 벗어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 중심 질문이다. 자유인이 되겠다며 속세를 탈출해도, 속세의 배움과 역사에서 벗어날 순 없다. 진중권이 말했던 지평 얘기를 끌고 온다. 예술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이 매번 바뀌어 정답이 생길 수 없는데, 한 시대를 넘으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고 한다. 나는 세상 사람 누구도 지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를 영화에 대입시킨다.


마을 사람들에게 속아 구덩이의 삶을 시작한 장면은 새로운 지평이 열렸음을 시사한다. 주의할 점은 새로운 지평은 항상 더 나은 것으로의 진화가 아니란 사실이다. 물론 정체성에 대한 답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에 우리는 저항한다. 예술에서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로의 변화, 혹은 고귀한 것들에서 일상적인 것으로의 소재 전환 등이 대중의 반발을 불렀듯 말이다. 그는 직면한 환경에 발악한다. 마을 사람, 여인, 집, 날씨, 더위 등 주위엔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들 뿐이다. 의미 없는 모래 구덩이의 생활이 자신의 삶을 수렁으로 몰고 있음을 단언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백기를 든다. 개인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흐름이 생긴 것이다. 주인공은 굴복하고 노동을 시작한다. 재밌게도 새 지평엔 새로운 가치가 있다. 노동이 납득할만한 삶의 목적으로 변한다.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시스템의 전언에 휘둘려, 자신은 누구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인류의 선배들이 남긴 여러 예시를 보고,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어떤 것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적당히 섞는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그때, 그곳에서 태어난 이는 당신 하나뿐이다. 기억 속 A, B, C, D, E, F란 경험을 다 해본 이 역시 당신뿐이다. 그래서 뭐? 과연 그런 경험들이 모여 발생한 독특한 무언가가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이 사회가 만든 교육을 받고 예능을 보고, 게임을 한다. 타인이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을 표출한다. 나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은 힘들다. 왜냐고? 특별해야 하는데 특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냐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역시 대답할 수 없다. 모든 행동에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굳이 내가 아녀도 다른 정자가 태어나 부모님께 비슷한 정도의 효도를 하고 비슷한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시스템 속 고유의 개념이란 것은 허상이다. MBTI 설문지의 100배 확대 버전이 있다고 하자. 하나하나 범주로 정해놓고 세분화한다면, 성질이 99.9999% 비슷한 누군가가 몇은 나올 터이다. 사물이 아닌 이상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은 없다. 아니, 뒤샹의 샘을 보라. 사물마저 본질이 변하는 세상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한다는 것은 순간을 캡쳐해 나온 범주를 설명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 모래 구덩이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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