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경계를 본 후

3월 공통주제 <정체성> ㅣ 최나영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1-22 오후 5.01.21.png 연희동 카페 도피성 주인
종일 카페에 있으며 전 저만의 다락방을 상상해요. 다락방 속에는 제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에 존재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이 정돈되어 있죠. 그 다락방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만나곤 하죠. 저는 저만큼 신비로운 존재를 이제껏 만나본 적이 없어요.


작가 프로필 ㅣ 최나영

기독 신학교 출신인 그녀는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에 관심이 많다. 매일 그녀의 성에 들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하며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정체성.
[명사]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정체성이다. 나는 가만히 책상머리에 앉아 몇 번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정체성...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인 존재..."

정체성이 가진 속성의 소리가 나의 목소리를 통해 나의 귀에 들어온다. 그것은 이내 내 사고와 감정에 불편한 자극을 주고야 만다.

'변하지 아니하는', '독립적인'.


인간이 변하지 아니하던가? 인간이 진정 독립적일 수 있는가? 불변과 독립의 문제는 고사하고서라도 존재의 본질을 깨닫기 위하여 그동안 인간은 지구가 자전한 수만큼이나 철학하였다만 어디 우리 존재의 본질을 명쾌하게 깨달은 자가 있던가? 그럼 나는, 인간은, 인류의 역사는 왜 이 정체성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변하지 아니하는' 나의 본질을 깨닫고, '독립적인' 나의 존재를 설명한단 말인가? 나는 절망했고 기어이 책상머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며칠 동안 정체성이란 단어는 나를 괴롭혔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는 정체성이 가진 사전적 정의가 그랬다. 며칠을 나는 과민한 신경을 곤두세워 고독했다. 고독하기로 결정했다.

고독에게만 만족을 얻는 자라면 알 테지만 고독한 밤은 영롱하다. 고독은 나를 향해 자신을 영롱하게 뿜어 나에게 은밀하게 습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바로 영민함이다. 고독한 밤은 인간을 영민하게 한다. 그러나 영민한 자는 또한 알 것이다. 이 고독한 밤에 무섭게 뒤따라 붙는 아침의 냉정함을. 밤과 아침의 격차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고독은 잔인할 만큼 증가된다. 그렇게 그 날 아침, 고독은 더욱 잔인하게 나를 습격해 기어이 내 사고를 진압하였다.

" I am who I am...!"
진압된 내 사고 속에 갑자기 우뢰와 같은 천둥이 울렸다. 이 울림은 직관적이었고 논리적 설명이 불가한 것이었다. 영롱했던 밤. 냉기도는 아침. 제압되어 무능한 상태의 나. 우뢰같은 두려운 음성.
"나는 나다...!"

그랬다. 나는 제압된 그 상태에서 조금의 움직임 없이 천둥을 맞이했다. 나는 미동 없이 그와 나 사이의 경계를 보았다. 경계를 마주했다. 아니 경계가 나를 마주했나 보다. 난 무엇도 마주할 능력이 없었다. 난 철저히 제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가 말해 주고 있었다. 소리가 나를 깨우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스스로 그다. 그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으로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으로부터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그이고 스스로 있었다. 그렇게 그는 그냥 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나다'로써 정의될 수 없다. 나는 스스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존재한다. 즉 나는 '그로부터 있는 나'인 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존재하는 나다. 나는 그로부터 나와서 내가 되었다.

소리와 함께 나는 그와 나의 경계를 아는 것 그것이 나의 정체성의 출발이 되었다. 스스로 있는 자로부터 나와서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 이것이 나의 실존이다. 나는 끊임없이 가변하나 나를 있게 한 자는 불변한다. '그는 그'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 만 가지 환경에,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종속되어 있으나 나를 존재하게 한 자는 홀로 독립적이다. '그는 스스로 그'이기 때문이다. 이 날 아침의 경험은 며칠 전 '정체성' 이 가진 국어사전의 정의가 나에게 준 불쾌한 자극을 명쾌한 자극으로 바꾸어 주었다. '변하지 아니하는, 독립적인' 그로부터 나온 나라는 존재가 '변하며, 종속적인'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체성의 정의는 내 안에서 '그는 그'이고 '나는 그로부터 존재하여 실존하는 나' 가 되었다. 냉정한 아침의 고독이 나의 존재의 열정이 되었다. 비로소 고독이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나도 그를 마주하여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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