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공통주제 <정체성> ㅣ 한공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글쓰기 공동체 '파운틴' 운영자
보통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청순한 남자이고 싶어 한다.
0. 프롤로그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가 말했다.
" 인간은 누구나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어릴 적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지금 난 매일 아침 눈을 뜨며 그 말을 실감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니 눈 뜨기 바로 직전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 난 왜 없지 않고 있는가?'
그리고 나라는 생명체가 어떤 존재인지 곱씹어 본다. 미생물인지, 어류인지, 파충류인지, 조류인지.. 암컷인지 수컷인지도 난 모른다. 뭔가가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눈을 떠서 보니 고양이가 내 앞에 있다. '냐옹~(밥 줘~)'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를 인식한다.
난 인간이고 수컷이고 동양인이고 한국인이고 고양이와 함께 사는 독신남이다.
역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그것의 관계성을 통해 자신이 구분된다. 그것이 의식의 세계이다. 난 매일 아침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만약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넘어오지 못한다면 난 식물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식물도 의식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 적절한 비유가 아닐지 모른다.)
이렇게 한없이 연약한 존재가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내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인식하려면 우선 인류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고, 그다음엔 동양의 정체성 그다음엔 동북아시아의 정체성 그다음엔 한국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복잡하다.
그래서 난 일단 '인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본다.
성경에서 시작해보자.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있는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면 신 외의 모든 존재는 <스스로 있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제1 전제이다.
1 전제: 인류는 스스로 있지 못하는 존재
즉 인류 존재는 관계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긴 신화를 보면 인류는 '신의 파편화이고 그 파편들은 모두 불완전하다.' 하니 맞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최근 보았던 재패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을 보면 인류 특성의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인물 외곽선이 굉장히 굵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모든 존재를 개별자로 나뉜 것이다.
우린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경계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거인 마저도 엄청 두꺼운 외곽선을 가지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존재들은 그 경계 안에서 스스로의 욕망대로 살아가고 서로 도울 수도 충돌할 수도 있다.
여기서 2 전제와 3 전제를 뽑을 수 있다.
인류는 각각 개별적으로 분리된 존재이고, 각자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간다.
2 전제: 인류는 각각 개별적인 존재로 분리되어 있다.
3 전제: 개별적인 개인은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살아간다.
둘째, 인간들은 모여 산다. 그들은 거인들에게서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 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현실에서 보자면 그 성벽은 지구라고 할 수 있다. 우린 모두 지구 위에 살고 있으며 지구를 벗어날 수 없다. (만약 외계인이 침공하면 그 외계인이 거인 같은 것이다. ) 그래서 인류는 필연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4 전제: 인류는 공동체 생활을 한다.
성벽 안의 사람들 사이엔 계급이 있다. 가장 안쪽 안전한 곳에는 왕과 귀족들이 가장 바깥쪽 위험한 곳에는 서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는 마치 과녁과도 같은데 인류의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계급은 늘 존재했다. 힘 > 신분 > 돈...으로 100점 사람, 50점 사람, 20점 사람이 나뉜다.
결국 인류는 계급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위에 있는 자들은 밑에 있는 자들의 도움을 편하게 살고, 밑에 있는 자들은 거의 노예 수준으로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이런 불평등한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상위에 있는 자들의 고집 때문이다. 이들은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재미있는 것은 하위에 있는 자가 상위에 있는 자들 미워하다가도 운 좋게 자신의 서열이 올라가면 오히려 이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힘쓴다. 계급의 맛을 느껴봤기에 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4 전제와 5 전제를 뽑을 수 있다.
4 전제: 인류는 계급사회이다.
5 전제: 인류는 각자 자신의 관념 속에 살고 있다.
거기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거인과 인간의 전쟁 혹은 계급과 계급의 갈등을 보면 모두 개개인의 욕망에 충실하다. 즉 너와 나 사이의 절대적인 '선'이란 없다. 본능적으로 각자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한다. 거인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잡아먹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닌 것이고, 성 가장자리 상위 계급자의 입장에서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안전하다. 이는 '관념론'과 연관이 있다. 모든 존재들은 자신만의 우주(관념) 속에 살고 있다. 지구에 60억 인구가 있다면 60억의 우주가 겹쳐있는 것이다. 60억 명 중에 그 누구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질 수 없다. 개인은 누구나 자기 생명 유지 본능이 있고 자신이 잘 되길 바란다.
자 이제 위의 전제들을 다시 합쳐보자.
1 전제: 인류는 스스로 있지 못하는 존재 (관계성으로 의미가 생성)
2 전제: 인류는 각각 개별적인 존재로 분리되어 있다.
3 전제: 개별적인 개인은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살아간다.
4 전제: 인류는 공동체 생활을 한다.
5 전제: 인류는 각자 자신의 관념 속에 살고 있다.
즉 위의 5가지 전제는 어떠한 개인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세상에 던져지고 보니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이다.
태어나보니까 난 공동체 속에 개인이고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며 난 스스로의 욕망으로 살아가며 나의 우주와 타인의 우주와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주변에는 이 기본적인 다섯 가지 전제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 1 전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사이비 교주)
제 2 전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우리가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며 다양성을 부정한다. (파시스트)
제 3 전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성인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을 믿는다. (위선자)
제 4 전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모른다. (극단적 이기주의자)
제 5 전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같다고 착각한다. (바보)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모순에 빠져있다.
참 그 '모순'은 인류의 제 0 전제라는 것 아는가?
모순이란 ' 모든 것을 다 막는 방패 ' 와 '모든 것을 다 뚫는 창'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
정 반대에 있는 것이 공존하는 상태.
실제로 우주는 모순관계로 탄생했다.
신과 인간
빛과 어둠
불과 물
남과 여
오른쪽 왼쪽
위 아래
하늘과 땅
문과 무
정신과 육체
검정 흰색
등등등
그 모순이 개인의 존재 안에도 내포되어 있다.
즉 모든 인간은 다 모순적이다. 그것을 탓할 수 없다.
그 극과 극은 서로 통할 수 있다.
그것을 '도'라고 한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것을 '도통'이라고 한다.
도통한 자는 극과 극이 결국 같다는 것을 인식한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도통'에 도달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생과 사, 순간과 영원의 극과 극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결국 삶과 죽음이 같은 것이구나! 을 삶의 매 순간에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순간은 영원이란 말도 같은 말일 것이다.
1. 대부
이 영화의 키워드는 힘(Power)이다.
그 힘은 종교와 국가를 초월한다.
영화는 꼴레오네 가문의 권력유지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꼽으라면,
대부의 막내아들 알파치노가 아버지의 사업에 절대 끼지 않으려 했다가... 우여곡절을 겪고 결국 대부 역할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여자친구와 만났을 때 나온 장면이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변한 것을 보며 깜짝 놀라며 그의 사업에 반대한다. 알파치노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누구나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자 친구: 자긴 너무 순진해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알파이노: 누가 더 순진한지 모르겠군...
어릴 적에 이 영화를 볼 때 이 대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그땐 내가 무척이나 순진했던 것 같다.
난 어릴 적에 국가, 대통령, 국회의원, 경찰, 군인 아저씨, 소방관, 공무원, 목사... 모두가 선하다고 믿었다.
그때 내가 몰랐던 것은 그들도 인간이란 사실이고 내가 믿었던 것은 그저 나의 관념일 뿐이었다.
즉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지 진짜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성인이 돼서야 사회가 '힘의 원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 나만의 관념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누구나 이기적이다.
하지만 개인이 혼자 힘을 발휘할 수 없기에 인간은 뭉치게 되는 것이다.
같은 목적을 가진 공동체는 점점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 공동체가 커지면 민족이 될 수도 있고 국가가 될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모든 국가의 존재 이유는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모인 공동체원들은 우선적으로 자기 공동체의 이익에 우선시한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상관없다.
원래 인류는 역사적으로 '선과 악'에 관해 절대적인 기준을 만들지 못했다.
인류가 규정하는 '선'은 자기와 자기 공동체에 좋은 것 '악'은 그것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런 개념을 기반으로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과 학살 등이 존재했다.
총균쇠를 보면 인종의 지능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도 모두 허위였다는 것이 증명된다.
과학적인 근거 없이 결과를 지정해놓고 과정을 조작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자기합리화' 였다는 것.
그 과정도 결국 힘으로 규정되었다는 것.
그것이 인류의 슬픈 역사이다.
역사는 그렇게 '가진 자의 논리'로 쓰였다.
난 이 영화를 통해 인류 정체성의 여섯 번째 전제를 발견해본다.
6 전제: 인류의 진행 방향은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2. 안경
2007년 이 영화가 국내에 개봉했을 때 난 막연하게 코메디 영화인 줄 알고 지인들을 설득해서 단체관람을 했다.
영화가 끝난 후 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했다.
"뭐야? 뭐야? 이게 재밌냐? 졸려 죽는 줄 알았다."
나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섬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이 영화를 돈과 시간을 할애해서 보았다는 것이 뭔가 억울했다.
그런데 최근 집에서 혼자 다시 보았을 때 난 마지막 장면(할머니가 주인공이 1년 전에 짜 준 붉은 목도리를 하고 걸어오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고 자막이 올라갈 때 기립박수를 쳤다.
안경은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한창 유행하는 '슬로우 라이프, 힐링'의 매뉴얼 같은 영화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인간의 마음'에 포커스를 두고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마음의 자유함을 만끽하게 해준다.
사색의 중요함이라던지, 소통의 중요함이라던지, 비움의 중요함이라던지...
그런 동양의 선사상이 곳곳에 배어있는 이 영화가 지금보다 9년 전에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다.
몇 년 전 일본 여행을 갔을 때 (후쿠시마 원전 터지기 전에)가 기억난다.
Tokyo Care라는 책을 들고 동경을 돌아다녔다.
스타벅스가 아닌 주인이 직접 내려주는 개인 카페 커피를 마시며 힐링을 느꼈다.
주인의 정성, 그 카페만의 커피 맛과 전통, 진정성과 인간미...
이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런 문화가 국내에서 점점 확산되어 매우 기뻤지만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그런 카페는 금새 문을 닫는 것을 지켜보며 씁쓸한 한국의 한계를 실감하였다.
한국에서 힐링은 늘 항상 상품과 돈에 연결이 되어 있었다.
'좀 더 가격이 나가는 힐링 상품'
웃긴 것은 힐링콘텐츠에 대한 진정한 접근성이 없이 돈에 집착하는 업주들이다. 콘텐츠도 형편없다.
진짜 힐링이란 적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얻는 자본주의적 원리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런 원리에서 탈피해야만 진짜 힐링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콘텐츠 디자이너로서 전 세계의 '힐링 콘텐츠'를 연구하면서 느낀 것은 그 콘텐츠의 중심이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힐링 콘텐츠의 가장 큰 키워드는 Free이다. 그래서 진짜 공짜만큼 좋은 힐링콘텐츠도 없다.
내가 진행했던 대부분 힐링 콘텐츠는 초기 접근에 늘 공짜를 고수했다. 물론 업주를 설득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지만 결과는 늘 성공적이었다.
힐링콘텐츠를 만들려면 시선을 멀리, 넓게 봐야 한다.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는 고객들이 하나 둘 늘어나서 문화를 형성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바이럴 마케팅으로 고객층을 확산한다. 즉 '이 콘텐츠 돈 주고 사!' 하는 다이렉트 한 방법은 힐링을 주지 못한다.
우린 누구나 힐링 콘텐츠가 될 수 있다. 타인에게 거저 주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
거저 받은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열린다.
마음이 열리는 바로 그 과정이 자유(Free)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한다.
마음의 자유는 신체적 자유를 초월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제목)를 읽어보자.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 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마지막 줄, 심장이 바람에 풀리는 그 순간 우린 자유를 느끼고 힐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본연의 육체의 한계를 탈출하는 순간이다.
7 전제: 인류는 자유를 갈망한다.
3. 설국열차
자본주의 사회를 이렇게 깔끔하게 우화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또 있을까?
모르겠다. 어쨌든 난 극장에서 혼자 설국열차를 보며 혼자 키득키득 거렸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겉으론 오락영화의 포장을 하고 있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굉장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메세지를 진지하게 담고 있다.
설국열차가 시사하는 가장 큰 메세지는 이 시스템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최초로 꼬리칸에서 머리칸까지 이동한 커티스에게 윌포드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려 하고 커티스는 순간 갈등한다.
결국 사람은 계속 바뀌지만 시스템은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수한 문제와 한계에 봉착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은 쉽사리 변화되지 못한다.
그 시스템의 엔진이 바로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은 계속 바뀌어도 인류의 욕망은 늘 항상성이 있다.
우린 제 3 전제에서 이런 점을 다뤘다.
3 전제: 개별적인 개인은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살아간다.
즉 설국열차는 태생적인 한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이 욕망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벗어나면 정말 희망이 있을까?
최근 사민주의 국가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희망'이 보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민주의 국가로 전환하지 못하는 이유는 객관적인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권력과 시장 때문이다.
그것은 국내의 교육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음에도 그것이 바뀌지 않은 사례와 같다.
교육인적자원부 교육정책담당관을 했던 남승희 교수의 '최고의 학교'라는 책을 보면 대한민국 교육의 민낯이 샅샅이 드러나있다.
책을 읽으며 대한민국 교육제도의 초점이 진짜 교육에 있지 않고 '돈과 권력'에 있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 못함을 알았을 때 무기력함과 좌절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교육제도는 사회 시스템과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교육은 계급사회의 악순환에서 탈출하는 첫 번째 과제이다.
어릴 적부터 잘못 세뇌된 아이들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은 정말 어렵다. (교육계에 있었던 개인적 경험으로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설국열차가 상징하는 것은 몇 가지가 있다.
엄청난 가속도로 질주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그 시스템에 익숙하게 살며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미래적 망상에 사로잡혀 욕망의 노예가 된 우리들
그리고 무한하게 반복하는 악순환...
하지만 송강호가 연기한 '남궁민수'는 남들처럼 머리칸으로 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그의 진정한 목표는 이 열차에서 탈출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아직 본 적 없는 세상이기에 도전을 꿈꾸기 힘들지겠지만...
그것이 두려워 계속 열차 안에만 머물러있다면 절대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인류는 늘 도전을 통해 진보해왔다.
남들의 비웃음과 멸시를 느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했던 개인들이 결국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결국 인류는 과거의 지평에서 탈출했었다.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 인류의 본능이기도 하다.
난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전제를 발견한다.
인류는 늘 도전(challenge)으로 진화하다.
8 전제: 인류는 늘 도전을 통해 진화한다.
4. 공각기동대
마지막 영화는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이다.
최근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시합으로 다시 이 영화가 국내에서 회자되고 있다.
1995년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난 도저히 스토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신이 드러나는 이미지들에 취해 어지러웠다.
내게 그저 '야한 만화'라고 인식되었던 공각기동대가 엄청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 '네트는 넓다'도 도저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당시 국내 네트워크 기술은 그 영화를 이해할 정도로 발달되지 않았었다.)
인공지능과 공각기동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결국 기술이 발달해서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실현되면 기계가 인간을 다스리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라는 관점과
' 공각기동대는 허구다. 영혼은 신의 창조 영역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돼도 인간이 영혼을 창조할 수 없다.'라는 관점이 극으로 나뉜다.
많은 유물론자, 진화론자, 무신론자들이 인간의 영혼을 부정할 때 나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진정 당신은 스스로가 영혼이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이 문제는 과학적인 분석으로 시비를 나눌 수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차원은 한정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너머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기에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것의 판단은 개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어제 교회에 갔을 때 목사님이 하신 설교말씀이 떠오른다.
" 과연 기계가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과연 기계가 이길 수도 있는데 져주는 너그러움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나도 그 말씀에 공감한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은 인간이 가진 복잡한 마음과 영혼을 절대로 대체할 수가 없다.
인간인 우리도 그것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기계에게 그것을 심을 수 있겠는가?
또 만약 인간의 기술이 엄청 발달해서 언젠가 그것이 실현된다면, 그 시점은 인간이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을 때나 가능하다.
지금으로서 우린 우주의 끝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난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공각기동대의 감상평을 인터넷에 뒤졌을 때 대부분 '기계가 자신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가?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의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난 그것과 다른 것을 발견했다.
어쩌면 구글로 공각기동대를 검색해 전 세계 네트워크를 뒤져도 내가 발견한 지점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부터 펼치는 논리는 세계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마지막에 쿠사나기가 인형사와 접속하는 장면 이후... 난 엄청난 것을 보고 말았다.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 쿠사나기는 자신의 머리 위로 하얀 깃털이 떨어지는 환상을 본다.
그것은 마치 신의 영역인 천상으로 들어가는 느낌과 같다.
오이시 마모루 감독은 쿠사나기가 넓은 네트에 접속하면서 개별이 아닌 전체(신)가 되는 것을 상징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 메타포와 맥락은 영화 '루씨'나 'Her'에서 반복되어 쓰인다.
난 무의식적으로 재빨리 둘이 기계가 아닌 인간이라고 설정했다.
만약 둘이 인간이고 서로 완벽한 교감을 한다면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교감하며 국적, 인종, 성차를 떠나 하나가 되는 기분...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마음과 마음을 나눌 때 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독일 청년은 내게 왜 우냐고 물었다.
난 대답했다.
" I don't Know... I just feel here is heaven"
또 탱고라는 춤을 추면서
파트너와 긴밀한 교감을 할 때 동양에서 말하는 '선'을 느끼기도 했다.
나의 육체가 사라지고 가벼워지며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자유로운 기분
즉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가 했던 결합과 자아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자유를 경험하는 것은 이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영혼의 능력이라면 쿠사나기는 인간의 복제일 뿐이고 인간의 능력을 대신 증명해준 것이다.
그래서 난 공각기동대도 믿고, 인간의 영혼도 믿는다.
그래서 인류 정체성의 마지막 전제의 키워드는 영혼(Soul)이다.
제 9 전제: 인류는 영적 존재이다.
지인과 술을 마시며 공각기동대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린 서로 다른 관점으로 격한 논쟁을 벌였다.
그때 마침 우리가 시킨 안주가 도착했다. 매운 홍합찜 이었다.
홍합 속이 텅텅 비어있는 껍질이 많아 화가 났다.
그때 지인이 말했다.
" 야! 이거야 말로 제대로 Ghost in the shell이네!"
∞. 에필로그
- 사이의 미학-
모든 진리는 극과 극의 사이에 존재한다고 한다.
그래서 극과 극을 가지고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 싸울 필요가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도 말했다.
" 삶이란 결국 생(birth)과 사(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다."
결국 나의 정체성이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인류의 기본 전제라는 땅위에 내가 씨를 심고 거름과 물을 주며 키우는 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그 나무에서 열린 열매가 나도 모르는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이에 있는 자는 규정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무한한 존재이다. 이것을 10 전제로 첨가한다.
1 전제: 인류는 스스로 있지 못하는 존재 (관계성으로 의미가 생성)
2 전제: 인류는 각각 개별적인 존재로 분리되어 있다. (단독자의 집합)
3 전제: 개별적인 개인은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살아간다.
4 전제: 인류는 공동체 생활을 한다.
5 전제: 인류는 각자 자신의 관념 속에 살고 있다.
6 전제: 인류의 진행 방향은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7 전제: 인류는 자유를 갈망한다.
8 전제: 인류는 늘 도전을 통해 진화한다.
9 전제: 인류는 영적 존재이다.
10 전제: 인류는 무한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