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한공기

3월 공통주제 <정체성> ㅣ 한공기

by 한공기
427155_315705241826240_873170111_n 복사본.jpg 마음탐정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글쓰기 공동체 '파운틴' 운영자

보통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청순한 남자이고 싶어 한다.




내 본명은 이장욱(글장에 빛날 욱)이다.

서당 훈장이었던 할아버지가 문인으로 이름을 빛내라 지어주신 이름인데 슬프게도 이미 유명해진 소설가 이름이기도 하다. (분명 그의 본명이 아닐 것 같다.)

나의 소설반 선생님은 본명은 못쓰겠다며 필명을 쓰라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도민호라고 지었다. (자연스럽게 영어 이름이 Domino가 되었다.)


그런데 어제 있었던 일이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청소를 하다가 책상과 벽 사이에 끼어진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2년 전 즈음 쓴 것인데 몰스킨 미키마우스 한정판이다. (검은색 표지에 미키마우스가 그려져 있는 것) 그것을 펼치자 먼지가 너풀너풀 솟아올랐고 회사 일에 관한 내용(스케줄, 회의 내용, 지출비용, 낙서...)의 잡다한 것들이 페이지마다 과거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3분의 2 지점부터는 빈 여백이었다. 참 나쁜 습관이다. 다이어리나 노트를 사놓고 끝까지 쓴 적이 없다. 심하게는 반 정도까지 쓰고 또 새 것으로 갈아치울 때도 있다. (나만 그런가?)


나머지 여백을 뭘로 채우지 고민하다가 맨 마지막 장에 남겨진 메모를 발견했다. 내 글씨가 아니었다. 여자 글씨다.



과장님, 잘 지내세요. 안녕



백수민(가명)이라는 여성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녀는 2년 전까지 우리 회사에서 일했던 직원이었다. 키가 크고 깡마른 그녀는 말수가 적었고 일을 열심히 했다. 그 당시 23살이던가 25살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우리 회사가 쇼핑몰이라서 그녀는 주로 고객 전화를 받거나, 판매된 제품의 송장을 만들었다. 희고 갸름한 얼굴에 이쁘장한 외모라 많은 남자 직원들이 괜히 말을 걸거나 장난을 쳤지만, 그녀는 일과 관련되지 않은 어떠한 대화에도 응대하지 않았다. 특히 나와는 전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아니할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다. 디자인팀인 나와 그녀가 일적으로 대면할 일이 없었고 점심시간에 그녀는 혼자 회사에 남아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그런 그녀가 어떤 사연을 거쳐서 내 노트에 또박또박한 글씨로 이런 메모를 남겼을까? 아마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의 나로 돌아가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는 회사에서 홍보디자인과 제품 촬영을 동시에 맡고 있다. 여성 봄 원피스 제품을 찍어야 했고 모델을 섭외했는데 촬영 당일 오전 모델로부터 <감기가 걸려서 몸이 아파 못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문자가 왔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20대 초반의 쇼핑몰 모델들의 무책임과 무개념은 너무 많이 겪어서 이골이 났지만 촬영 당일 날은 정말 너무했다란 생각을 했다. (그것도 문자로...) 반드시 그날 촬영해서 디자인팀에 넘겨야 했기에 난 책상에 앉아 묘수를 생각하다가 문득 내 모니터 건너편으로 보이는 백수민 직원의 얼굴이 보였다. 카메라 렌즈로 보지 않았지만 분명 사진빨이 잘 받는 얼굴이다. 희고 마른 것도 모델 같아서 옷빨도 잘 받을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녀가 카메라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사무실을 비우고 나와 야외 촬영을 갈 수가 있을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대표에게 사정을 말했다. 대표는 무조건 오늘 촬영이 급하다며 그 여직원을 따로 불러 자신이 부탁해보겠다고 했다. 난 회의실 밖에서 서성거리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녀의 결정을 기다렸다. 10분 즈음 후에 문이 열리고 대표가 먼저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대표는 내게 그녀가 수락했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달라고 했다. 난 회의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우린 서로 마주 보고 앉았고 난 난생처음으로 그녀와 대화를 했다.


"괜찮겠어요?"

"급하다고 하시던데 어쩔 수 없죠."

"고마워요."

"뭘요..."


그녀의 작은 눈이 반달이 되었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우린 명동 근처에서 사진을 찍었다. 남산 산책길에서부터 시작해서 역 근처 카페, 명동거리... 이동할 때마다 나는 카메라 가방, 그녀는 쇼핑백 세 개를 들고 다니며 힘들게 촬영했다. 봄의 햇살은 따가웠고 어느새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 그녀의 포즈는 다소 어정쩡했지만 시크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누구도 그녀가 원래 전화받는 여직원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촬영 중간중간 담소를 나누며 그녀가 김포공항 근처에 살고 스튜어디스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가 스튜어디스 복장을 입고 있은 모습을 상상해보았는데 갑자기 영화 중경삼림이 떠올랐다. 그동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중경삼림에 나오는 여배우랑 무척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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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한 장면-



해가 조금씩 기울고 늦은 오후가 됐을 때, 가장 사진 찍기 좋은 시간인 매직 아워(파란 시간)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6시 그녀가 퇴근할 시간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수민 씨 저 죄송하지만 좀 있으면 사진 찍기 가장 좋은 매직 아워가 찾아오는데... 그때까지 촬영하시면 안돼요? 끝나고 수민 씨가 먹고 싶은 것 뭐든지 사드릴게요. 저 회사 카드 있어요 ^^"


그녀는 매직 아워가 뭔지 물어보았다. 해 질 녘 일광의 잔빛이 자동차나 가로등, 건물 불빛과 겹치며 하늘이 새파랗고 도시의 불빛이 빛나는 시간. 그 시간은 매우 짧아서 20~30분 내에 사라진다... 그녀는 자기도 매우 좋아하는 시간대라며 그 시간대에 자신의 얼굴 클로즈업도 찍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명동 성당 앞에서 몇 개의 화보 촬영을 찍고 그녀의 얼굴을 찍어주었다. 이쁘게 찍어주기 위해 85미리 카메라 렌즈로 교체를 하고 명동성당을 배경으로 그녀를 앞에 세웠다. 프레임 그녀 너머로 파란 하늘과 불빛이 반짝이는 서울타워도 보였다.


"수민 씨 웃으세요~"

"네?"


그녀는 당황했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건 아닌데... 생각하다가 그런 말을 했다.


"수민 씨 그거 알아요? 수민 씨 회사에서 보면 굉장히 무서워 보여요."

"네? 제가 무섭다고요."

"응...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고객들 전화를 114 직원처럼 받잖아요."

"과장님도 무서워요."

"네? 제가요?"

"회사에서 한마디도 안 하시잖아요. 6시면 칼퇴근하시고... 나가면서 인사도 안 하시고 나가잖아요. 닌자처럼..."

"닌자요?"

"네 닌자처럼 매우 조용하고 빠르게 사라지잖아요."


오히려 내가 빵 터져서 고개를 제치고 웃어버렸다. 내가 웃자 그녀도 웃었다. 난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녀의 웃는 얼굴을 찍었다.

찰칵!


"뭐예요. 치사하게... 준비도 안 했는데... 정말 닌자 같으시네요."

"원래 자연스러운 웃음이 가장 이쁜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은 근처의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난 갈빗살 3인분을 시켰고 그녀는 쇼핑백 속의 옷들이 냄새 벨까 봐 주인에게 큰 봉다리를 가져 다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고기를 굽고 있는데 그녀는 재빨리 집게를 빼앗았다.


"괜찮아요. 제가 구울게요."

"아니에요. 그럼 제가 불편해서..."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 그녀 앞에서 난 멋쩍어 혼자 소주잔을 채우고 홀짝홀짝 마셨다.


"저.. 과장님."

"네?"

"저 밥 한 공기 시켜도 돼요?"

"그럼요~"

"제가 밥을 안 먹으면 뭘 먹은 것 같지 않아서... 죄송해요."

"아네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 그녀가 신기했다. 난 차라리 밥보다 고기를 많이 먹고 뭔가 아쉬우면 냉면을 먹는 편인데 그녀는 고기는 몇 점 먹지 않고 밥을 주로 먹었다.

그때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난 그녀에게 회사 일이 힘들지 않은지 물었을테고 그녀는 할만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김포공항 근처에 살아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은 건지,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어서 김포공한 근처로 이사를 한 건지 물은 것도 같은데 그녀의 대답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고향이 어디인지 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전라도였던 것은 확실한데 지역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기억나는 대화 내용이 있다.


"사실 전 이곳이 고향이에요."

" 네? 과장님 고향이 명동이에요?"

" 명동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전 한 5년간 명동성당 건너편 골목에 있는 건물에서 산 적이 있어요. 이곳에 제 스튜디오가 있었거든요."

" 스튜디오? 방송국이요?"

" 아녀. 제가 원래 CF 감독일을 해서 편집실이 바로 요 앞에 있었어요. 거기서 먹고 자기도 하고..."

" 와~ 명동에서 살았다고요? 좋았겠다."

" 좋긴요. 얼마나 번잡한데요. "

" 제가 여기 살면 맨날 쇼핑하러 다녔을 텐데..."

"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알아요? 진짜 딱 그런 기분이었어요. 최악의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날 혼자 스튜디오에 남아 편집한 적도 있어요."

"크리스마스예요?"

"네. 그날엔... 스튜디오 밖을 나가기 정말 두렵더라고요."

" 우와 진짜 불쌍해요..."

" 그렇다니까... 명동에서 사는 것은 정말 아닌 것 같아. 큭큭큭 "

" 그래도 좋았던 것은 없었어요?"

" 좋았던 것? 아침 6시마다 명동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깨는 것? 남산이 가까워서 자주 산책 갔던 것?"

"그때가 언제예요?"


난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여 기억너머의 아득한 그 순간으로 머릿속을 회기 했을 때 난 생각이 났다. 난 10년 전에도 이 고깃집에서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10년 전이라는 말에 그녀는 무척 놀라 했다. 10년 전에도 이 고깃집에서 이 자리에서 술을 마셨다는 말에 그녀는 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녀는 더더더 깜짝 놀랄만한 질문을 내게 던졌다.


" 그때랑 지금이랑 과장님은 뭐가 다르죠?"


공간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10년이 지나면 이곳의 나는 달라져있어야 하는데 내 삶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 이곳에서 직원들과 술을 마시며 했던 약속... 크게 성공해서 청담동에 스튜디오를 차리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그들에게 아니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삶은 역시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함께 일했던 그 친구들은 어디서 뭐하고 지낼까? 오랫동안 차마 연락을 못했다. 그녀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눈을 말똥말똥 뜨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뭔가 차이점을 찾아내야 한다. 대답을 하지 못하면 더 초라해질 것 같다. 그 찰나에 그녀 앞에 놓인 빈 밥공기가 눈에 보였다. 밥알 하나 남김없이 참 깨끗하게 먹은 빈 은색 밥공기를 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그 빈 밥공기... 그게 내 자신이라고 했을 때... 10년 전 나는 그 동그란 그릇 안 쪽에서 살았어요."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그 동그라미 밖에서 사는 것 같아요.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나이죠."


그녀는 그게 무슨 소리인 줄 몰라 애꿎은 빈 밥공기를 들어 안쪽을 살피고 바깥쪽을 살폈다. 나도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당시엔 그게 최선의 대답이었다. 우리의 화제는 금새 다른 쪽으로 바뀌었고 서비스로 나온 물냉면을 내가 비운 후 그 고깃집에서 나왔다.


만약 지금 그녀가 다시 물어본다면 좀 더 친절하게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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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하나의 동그라미로 간주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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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나의 정체성이 원 안에 있었다. 나의 욕망, 나의 만족, 내 안의 모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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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나의 정체성이 원 밖에 있다. 내가 있는 공간,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보는 것들, 내 밖의 모든 것들...



그래서 난 빈 공깃밥 그릇처럼 항상 내 자신을 비워두려고 노력한다. 대신 주변의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살피려고 노력한다.

노력은 하지만 그것이 너무너무 어렵다. 그래도 그렇게 비워둬야 결국 화수분처럼 무언가로 끊임없이 채워질 것이라 믿는다.

내 눈이 내 밖에 달려있으니까 그것이 나의 운명이자 의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세상은 나의 거울이다.


그 날을 계기로 우린 친해졌지만 우리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난 그해 겨울 새해 연휴기간 때 스키장에 가서 보드를 타다 넘어져 쇄골이 부러졌고 3개월이나 회사에 출근하지 못했다.

회사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자리에는 처음 보는 여직원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내가 다치고 입원했을 때 퇴사를 했고 내 빈자리에 놓여 있던 나의 수첩에 작별인사를 남겼다.

회사에 복귀한 후 그녀의 메모를 발견했을 때 카톡으로 안부를 물으려 했지만...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느껴져 그만두었다. 입사하고 퇴사하는 수많은 직원들을 그렇게 흘려보낸 것처럼...


하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녀가 고깃집에서 주인아저씨에게 외쳤던 씩씩한 목소리.


여기 밥 한공기 주세요!


그녀는 결국 스튜어디스가 됐을까? 혹시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지금이라도 깨달았을까?

에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냥 어디선가 밥 잘 먹고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밥 잘 먹고사는 것처럼...

우린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별 위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거로 된 거다.

그래 그냥 그거로 된 거다.


그래서 나의 필명을 '한 공기'(空빌공. 器그릇기)로 하고 싶다. 그게 내 정체성이라고 그냥 문득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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