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공통주제 <정체성> ㅣ 문소희
꿈을 자주 꿔요. 그 꿈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서 가끔은 지금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요. 그래서 꿈 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분리시키지 않으면 전 영원히 잠들지 모르니까요.
작가 프로필 ㅣ 문소희
패션 디자이너
Keyword: 말보로 맨솔,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가죽재킷
Victor Hugor 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갈 때 출구에서 바로 내려오는 사람의 긴 그림자가 날 덮쳤다. 게이트 밖에서 역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하얀 섬광은 밖에 UFO가 착륙했나 의심할정도로 너무나 밝았다. 역 밖으로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꺄~"하고 소리를 질렀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하늘은 터키 블루색이고 게이트 앞 보도블럭에 고인 물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어깨에 메고있던 에코백에서 재빨리 썬그라스를 꺼내 썼다.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행복할 수가...그런 생각을 하며 뽀송뽀송한 보도블럭 위를 걸었다. 약속이 없으면 좀처럼 아파트에서 나가지 않기에 줄리앙의 데이트 신청은 부담스러우면서도 반가웠다. 배우 아카데미에다니는 룸메이트를 따라 프랑소와 연기학교에 놀러갔을 때 줄리앙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학교 공지 게시판에 자신이 하는 공연 안내문을 붙이고 있었고 나의 룸메이트는 공지 게시판 앞에 멈춰서 레슨 스케줄을 확인하고 있었다. 금색 곱슬머리의 줄리앙이 우리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새파란 눈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 뻔했다. 여지껏 본 사람의 눈동자중 가장 아름다웠다. 짙고 푸른 에메랄드 빛이었다. 학교 창으로 새어들어오는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을 때 그의 눈동자는 더 밝게 빛났는데 그 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PANTONE 16-4725 SCUBA BLUE와 매우 흡사했다. 줄리앙은 자신이 들고있던 안내문 종이를 우리에게 내밀며 <보러올래?>라고 물었다. 룸메이트 리사는 유창한 불어로(그녀는 프랑스인이다) 그와 대화를 나눴고 난 옆에 서서 간간이 들려오는 단어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줄리앙이 말하는 그의 일상과 나의 일상을 퍼즐 맞추듯이 애써 결합시켰다. 줄리앙은 이번 주 일요일 학교 강당에서 공연을 한다. 작품은 세익스피어의 햄릿이고 줄리앙이 맡은 역할은 오필리아의 오빠 레어티스이다. 난 일요일 오후에 내가 다니는 한국인 교회에서 7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과 놀아줘야 하지만 공연시간인 6시까지는 공연장에 갈 수 있다. 리사가 줄리앙과 대화를 마치고 베소(안고 볼키스)를 할 때 내 안에서 스물스물 새어나오는 질투심이 느껴졌다. 줄리앙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웃으며 내게도 베소를 해주었다. 그의 뺨이 내 얼굴에 닿을 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와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지낸 사이라 느껴졌고 그의 뺨과 내 뺨 사이에서 둘만의 비밀과 지독한 드라마와 싸늘한 슬픔이 느껴졌다. 리사와 학교 식당에서 커피를 마실 때 그녀는 줄리앙의 목소리가 너무 감미롭지 않냐고 내게 물었고 난 못들은 척하며 리사 앞에 놓인 공연 안내문을 집어 천천히 훑어보았다. 리사는 그 날 밤 남자친구와 영화를 보러가기로 했다며 내게 가고 싶으면 가보라고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리포트를 써야해서 시간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 그곳에 가고 말았다. 혹시 그가 날 알아볼까 두려워 맨 뒷자리에서 연극을 보았다. 공연장은 100석정도 규모의 작은 곳이어서 무대가 잘 보였지만, 좀 더 앞자리에서 볼 걸 하고 후회했다. 내 자리에서는 그의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연기를 꽤 잘했고 그가 햄릿의 칼에 찔려 죽어갈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줄리앙의 뺨이 닿았던 내 뺨위로 눈물이 흘러내릴 때 난 우리의 미래를 예감했다. 그의 눈을 처음 본 순간부터 시간의 터널로 빨려들어갔고, 그 터널은 일방통행이기에 우리의 인연은 돌이킬 수 없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을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 강당을 뛰쳐나왔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학교 앞에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다음 정거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저녁의 공기는 줄리앙의 목소리처럼 달콤했고 줄리앙의 뺨처럼 따스했다. 사랑은 정말 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일까? 한 정류장의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심장은 터지기 일보직전 이었다. 아직도 눈물은 주체못하고 계속 주르르 흘러내렸고 살랑거리는 밤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줄리앙이 눈물을 닦아주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은 줄리앙으로 꽉 차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길을 걸을 때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창밖으로 파란 하늘을 볼 때마다 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앞자리에 앉은 금빛 머리를 한 남학생을 보며 혹시 줄리앙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가슴에 머문 두근거림과 통증은 가실 생각이 없었고 난 예전보다 말수도 줄고 좀처럼 웃는 일도 없어졌다. 리사는 내게 어디 아프냐며 걱정을 했고 난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줄리앙과 다시 만났다. 쁘렝땅 백화점 디즈니 매장에서 나를 잘 챙겨준 성가대 지휘자의 어린 딸 생일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겨울왕국의 엘사인형을 발견하고 딱 이거다! 하며 그것을 막 집으려했을 때 눈 앞에 있는 줄리앙을 보고 난 그만 얼어버렸다. (엘사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줄리앙은 날 보자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있는 한 꼬마에게 나를 소개해줬다. 그 꼬마는 줄리앙의 이복 동생이었다. 우린 몰 중앙에 있는 분수대 앞에서 추러스를 먹었고 줄리앙은 그제야 내 이름을 물었다. 내 영어 이름인 '아이린'이 너무 이쁜 이름이라며 칭찬해주고 내 입가에 묻은 설탕가루를 그의 큰 엄지손가락으로 훑어주었다. 난 아직 엘사의 마법에서 풀려나지 못한 것처럼 계속 얼어있었다. 줄리앙은 한국이란 나라를 한번도 안 가봤다며 가고싶다고 말했고 자신의 클래스 메이트에 민수라는 한국 학생이 있는데 원하면 소개시켜주겠다고 얘기했다. 난 몇 입 먹지도 않은 긴 추러스를 손에 든 채 <사실 너의 공연을 봤어>라는 말을 내내 입안에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줄리앙 뒤로 분수대 위에 올라가서 손으로 물을 만지며 장난치는 줄리앙 이복동생을 봤을 때 깜빡하고 엘사 인형을 사지않을 것이 떠올랐다. 아까보니 몇개 안남아있었던 것 같은데...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다시 그 매장으로 돌아가야될거 같다고 말하려는데 줄리앙이 내게 물었다. <이번 주 일요일에 뭐해? 같이 점심이나 먹을래?> 줄리앙 뒤로 보이는 분수에서 물이 높이 솟아올랐고 그의 이복동생이 물세례를 받으며 와우! 소리쳤을 때 줄리앙은 뒤돌아 꼬마에게 뛰어갔다.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사이로 보이는 아이를 품에 안은 그를 보았을 때 엘사의 저주가 이제야 풀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연락처를 주고 디즈니 매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다리에 힘이 없어 벽을 집고 천천히 걸어갔다. Trocadero 카페는 전에 리사와 몇번 가본적이 있다. 그곳은 에펠탑이 잘 보이는 카페로 유명하다. 역에서 카페로 향하는 길에는 클래식한 디자인의 고급스러운 아파트 단지가 있고 리사와 난 그 한가한 분위기를 무척 좋아했다. 근처에 유명한 카페가 몇군데 있지만 Trocadero 카페는 브런치와 딸기타르트가 가 유명해서 우린 종종 기분전환겸 들러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내가 한번도 에펠탑에 올라가 본적이 없음을 안 리사는 같이 가주겠다고 파리에 왔으면 꼭 에펠탑에 올라 파리 시내 야경을 보아야한다고 어수선을 떨었지만 난 다음에...라고 계속 미뤘다. 에펠탑에는 왠지 좋아하는 남자와 같이 올라가고 싶었다. 내게 에펠탑은 케잌 꼭대기에 놓인 단 하나의 체리같은 것이다. 소중하니까 아껴두었다가 맨 마지막에 즐기고 싶은...파리에 온 이후로 한번도 남자를 사귄 적이 없기에 언젠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가장 하고싶은 위시리스트를 남겨둔 것이다. 아파트 건물을 우측에 끼고 돌자 드디어 머릿속에 맴돌던 에펠탑이 실제로 보였고 이제 곧 저 곳에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예감이 들었다. 쭈욱 뻗어있는 카페 골목 사이에 있는 Trocadero 카페 테라스가 보였고 그 곳에는 금발머리에 폴로셔츠, 청바지에 흰 컨버스 신발을 신은 남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줄리앙이다.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푸른 하늘, 클림트 전시회의 황금색 포스터, 녹음으로 뒤덮인 가로수가 꿈처럼 아련했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그의 건너편 자리에 놓인 에스프레소 잔을 보고 당황했다. 커피가 반 즈음 담겨져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 손님의 흔적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나의 인기척에 놀라 뒤돌아 본 줄리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베소를 하려고 할 때 난 뒷걸음 치면서 <누구와 같이 있었어?>라고 물었다. 그때 카페 안 쪽에서 낯익은 사람이 티슈로 손을 닦으며 나왔다. 리사였다. 리사는 날 보자마자 지나가다가 우연히 줄리앙을 보고 같이 차를 마셨다, 너가 온다고 들었다, 나도 아직 점심을 안 먹었는데 셋이서 같이 점심을 먹자는 내용의 말을 속사포처럼 내 뱉었다.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은 리사와 줄리앙을 번갈아 보았다. 줄리앙은 얇은 황금색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서 앉으라고 내게 신호를 보냈다. 난 둘 사이에 에펠탑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았고 점원이 내게 다가와 에펠탑 그림 표지의 흰색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다. 내가 멍하니 메뉴판을 응시하는 동안 리사와 줄리앙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대화를 했다. 메뉴판 너머로 에펠탑을 바라보았다. 뮤지엄과 나무 사이로 보이던 에펠탑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푸른 허공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제야 난 내가 무엇을 주문해야할지 떠올랐다. 점원이 내게 다시 다가왔을 때 난 리사를 보며 말했다.
이건 내 꿈이야. 나가 줘!
당황하는 리사를 보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줄리앙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난 한시라도 놓칠 수 없는 간절함으로 그의 푸른 눈을 보았다. 그의 에메랄드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였다. 그 여인의 축 처진 어깨가 너무 안쓰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줄리앙은 팔을 뻗어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을 떴을 때 푸른 새벽빛에 아련하게 윤곽이 드러난 내 방안이 보였다. 뺨은 축축했고 손으로 머리 밑에 눌려있던 비게는 젖어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을 때 창 밖으로 울렁거리는 한강이 보였다.
줄리앙의 얼굴이 서서히 잊혀간다.
그의 푸른 눈동자마저 흩어져간다.
어제 밤 일기를 쓰려고 꺼낸 라미 만년필 펜촉이 굳어 물컵에 넣고 헹구었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자주 쓰는 터키 블루 잉크가 펜촉 사이로 새어나와 투명한 물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난 Dreamer이다.
매일 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을 꾸는...
그리고 난 영원히 잠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