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공통주제 <정체성> ㅣ 카르멘
취미로 술을 만들어요. 알콜이 주는 위로와 행복에 대해서 함께 공유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카르멘
학부 때는 일본어를 전공하고 대학원은 일본지역 전공을 했지만 서울에 삽니다. 잘 닦여진 아스팔트 같은 순탄한 인생을 살았지만, 같이 걷던 사람들도 이정표도 사라진 길 위에 홀로 서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이 길이 맞는지 고민이 됩니다. 아마도 지금은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봐야 하는 시간 같아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기란 녹록지 않다. 지금이야 세상이 바뀌어서 아들보다는 딸의 선호도가 높지만, 내가 태어난 80년대에만 해도 XX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차별의 그림자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졸졸 따라다녔다. 물론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사람밖에 못 되었다던가, 여자라서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 30년간 여자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차별과 의무의 강요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추측되며, 지금도 의사결정에 있어 중대한 선택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인생에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은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내 인생의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차분히 정리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1985년 부처님 오신 날 고추 없이 태어났다. 우리 집은 멸치 뼈대 가문으로 더욱 굵고 튼튼한 뼈대를 만들어 조상님을 모시고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는 일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아버지는 장남의 장남으로 당연히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고 있었는데, 내가 태어나기 4년 전 이미 딸을 낳아 집안 전체에 서운함을 안겼지만, 아직 여러 번의 기회가 남아있음으로 크게 좌절하지는 않았다. 나를 임신했을 당시 어머니는 위풍당당한 호랑이를 태몽으로 꾸어 아마도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지만, 기세 등등한 딸이 태어남과 동시에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당시 만해도 ‘둘만 낳아 잘 살자’는 캐치프레이즈가 힘을 얻던 시기라 자녀를 많이 갖는 건 미개한 풍습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시댁에서는 집요하고도 강도 높은 아들 타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아들 출산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 노력은 나의 어린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 아이는 아들이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나는 남자아이처럼 기르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꽃 달린 헤어 장식 대신 단정한 바가지 컷을 하고, 바지저고리로 된 개량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아직도 벽에 걸려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 아들 참 똘똘하다고 할 정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들 없는 집에서 흔히들 한다는 “남자아이 이름 짓기”로 내 이름이 ‘기남’이나 ‘기태’가 되지는 않았기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조금 더 커서는 “이왕이면”으로 시작하는 주변 사람들의 아쉬움 섞인 아들 타령을 수시로 들어야 했다. 어른들은 내 면전에서 “이왕이면 아들로 태어나지 그랬니” “이왕이면 달고 태어나지” 따위의 말들을 뱉어냈는데, 해석하자면 나는 멸치 뼈대 가문에서 고추 없이 태어난 순간부터 의문의 1패를 한 셈이다. 어릴 때는 전혀 느끼지 못 했지만, 나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모르는 사이에 존재의 부정을 당해 온 것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왕이면"으로 시작되는 언어는 문신처럼 마음 깊숙이 새겨져 '아들 아닌 나'를 스스로 주변화 시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주문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사춘기 때에는 나의 30년 인생에서 가장 남녀차별을 덜 받았던 시기이다. 집안에서는 작은아버지의 아들을 양자로 입적하라는 조부모의 어택은 가끔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받는 성차별적 억압은 생각보다 적었다. 짐작하건대 수능이라는 거대한 관문 때문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듯이 수학능력시험 앞에서 모든 수험생들은 평등했다. 대학입시에서 남자라고 가산점을 더 주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여자든 남자든 한 문제라도 더 맞는 사람이 인정받았다. 마침 남녀공학이었던 중학교에서 여고에 진학했기 때문에 바람직한 여성의 에 대한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어 좋아하는 떡볶이와 순대도 원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잠시 휴지기를 가졌던 여성차별은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내 인생으로 들어왔다. 성인이 된 후의 차별은 주로 외모적인 것으로, ‘여성성’에 대한 강요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등학교 시절 떡볶이와 동고동락한 탓인지 제법 큰 몸을 가졌던 나는 수차례의 미팅과 소개팅에서 좌절을 맛보았다. 뚱뚱한 몸과 화장기 없는 얼굴은 남자들이 선호하는 여성의 기준에서 많이 어긋난 것이어서, 그 시기에 주로 들었던 나를 둘러싼 새로운 주문은 “살만 빼면”이었다. “살만 빼면 참 예쁠 텐데...”, “살만 빼면 남자친구 금방 생길 텐데..”라는 가시는 성별이 여자인 친구들의 조언과 나를 걱정해주는 척하던 남자들의 위로의 말에도 박혀있었다. 결국 나는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간 여성적인 몸에 대한 주변의 강요와 압박에 못 이겨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20대 초년기를 살과의 전쟁으로 보냈다, 전쟁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으로 주변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승리의 쾌감과 동시에 비릿한 씁쓸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 년간 떡볶이와 순대를 멀리한 끝에 날씬한 20대를 보낼 수 있었지만, 20대 후반이 되어서는 외모 말고 나이가 차별의 표적이 되었다. 스물일곱부터 시작된 “어리지 않음”은 나의 부모님과 친척들과 스승과 선배들의 걱정에서 시작되어 내 스스로를 옥죄는 굴레가 되었다. 내가 의식하는 나는 스무 살이나 서른 살이나 큰 차이는 없었지만, ‘서른 전엔 시집을 가야 된다’는 이상한 강박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이 서른둘에 뒤돌아보면 헛웃음이 나오지만, 서른은 마치 여성의 유통기한처럼 새겨져 서른을 앞둔 여자는 내일 폐기될 삼각 김밥의 운명을 맞이할 것처럼 나를 초조하게 했다. 초조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괴력을 발휘해 서른 전에 무사히 결혼을 치르고 별 탈 없이 노처녀 강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서른을 넘겨버린 주변인들의 한탄을 들으면 그 비릿한 씁쓸함이 다시 떠오르곤 한다.
지금 현재, 임신을 준비하는 서른둘의 나에게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어릴 적 경험했던 ‘아들 타령’의 얼굴을 하고 다시 찾아왔다. 어린 내가 어른이 되는 사이‘아들 타령’은 내 어머니를 괴롭혔던 뾰족한 송곳 같은 말 대신 “이왕이면 아들이 좋지”라는 은근한 바램으로 돌아왔다. 당신 평생 아들 못 낳아 괴롭힘을 당한 딸만 셋인 친정엄마는 언니가 첫째 딸에 이어 둘째 딸을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눈물을 흘렸다. 사돈어른으로부터 당신 닮아 딸만 낳는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속이 상해서였다.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시대가 달라져 아들 가진 재미를 못 보고 살고 계신 나의 시어머니의 입에서도 ‘그래도 딸보다는 아들이 낫다’ 소리가 나왔다. 친정엄마의 오래 묵은 한과 시어머니의 자부심 담긴 바람은 기묘하게 뒤섞여 새삼스러울 것 없는 ‘아들 타령’으로 내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기란 녹록지 않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내가 아들이 아님을 아쉬워하기도 하고, 내가 여성스러운 외모를 갖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하며, 어리고 싱싱한 나이에 남자에게 간택당하지 못할까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을 한 지금 그들의 진심은 나를 옭아매는 차별과 억압임을 알아차린다. 그들 중 누구도 내게 꽃장식이 달린 하얀 드레스를 입고 싶은지, 예뻐지기 위해서 살을 빼고 싶은지, 결혼 말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은 없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여자라면 당연히 00해야 한다”는 출처 모를 사회적 기준이 아니었을까.
초보 아줌마가 된 지금도 나를 구속하는 차별적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다는 것을 안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차별에 움츠러들기도 하고, 반대로 나도 모르게 다른 여성에게 차별의 잣대를 들이밀기도 한다. 하지만 통통해져도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어 여성스러운 외모가 사랑받는 절대적 조건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남편과 보내는 일상은 행복하지만 싱글 여성의 삶도 유쾌하고 즐거웠을 것이라 상상된다. 서른이 넘으면 인생이 끝날 것 같던 순간도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여유롭고 인자하게 나이 들어가는 삶을 꿈꾼다. 조만간 나에게 찾아올 아이가 여자아이이던 남자아이이던 사랑 듬뿍 줄 수 있는 엄마가 되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