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공통주제 <정체성> ㅣ 이정민
전 건망증이 심해서 병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전 10시 반에서 11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은 몇 잔을 마셨는지... 흘러간 시간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들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정민
직장인. 성격이 무척이나 쾌활한데 힘든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일지도 모름.
첫 번째 생각.
나는 사춘기를 아주 순하게 보냈다.
사람에 따라 정말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10대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다는 것을 고등학교 기술가정 시간에 배웠다.
그렇게 첫째 딸로 큰 마찰 없이 컸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아버지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부분 그 순간은 나의 제안에 아버지가 "나는 한번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였고 그럴 때는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었다.
사랑이든, 억압이든 아빠에 의한 일방적인 관계에서 아빠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나의 노력으로 내가 했던 생각 혹은 어디선가 봤던 이야기는 한국의 부모들이 흔히 자식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긴다는 것이었다. 사소하게는 사사건건 참견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아이의 진로에 자신의 좌절된 꿈을 투영하는 것까지.
두 번째 생각.
대학생 때 나한테 의미 있는 비슷한 꿈을 두 번 꿨다.
첫 번째 꿈에서 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여자애처럼 갑자기 늙은 할머니가 되었고, 내가 묻힐 무덤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허망하게 끝나버린 내 삶에 대해 슬퍼하며 울다가 잠에서 깨었다. 어둠 속에서 눈가가 허하였다.
두 번째 꿈은 아이 품에 늙은 내가 안겨 있었고, 곧 죽는다는 사실을 변함없었지만 첫 번째 꿈보다 평안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것 같았다.
당시 이 두 꿈이 인상 깊었고, 지금은 당시에 이 꿈들이 기억에 남았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 꿈들에 대해서 하루하루 잘 살아야겠다고도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인생에 큰 의미로 삶의 마지막을 평온하도록 만들어 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 번째 생각.
엄마랑 닮은 점이 많다.
조용히 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 한 두 자 써보기도 하는 것, 사람들을 만나서 왕왕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 공부에 욕심이 있는 것, 꾸미고 치장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것 등.
엄마랑 10살까지 같이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10살 이전의 기억은 엄마가 서운할 정도로 거의 없다. 나와 동생의 양육권을 아버지가 들고 가면서 10살 후 십 대 동안은 엄마와 거의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엄마의 간곡한 요청으로 가끔 만나면, 어색해서 높임말이 나왔었다.
성인이 되고서야 편하게 만나기 시작한 엄마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엄마가 젊었을 때의 일과 빗대어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때마다 나는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것이 내 생각과 상관없이 명백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엄마, 내가 생각해봤는데요,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능력치 중에 가성비를 따져봤을 때 외모를 꾸미는 건 영 가성비가 안 나오는 거 같아서 대학교 1, 2학년 때 거의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노력을 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래도 뭐든 어느 정도는 해야 되는 거 같아요."
"어머나! 정민아 니는 그거를 벌써 아나? 나는 지금에서야 알게 됐는데"
"... 그게 무슨..."
"엄마가 젊었을 때 공장 다니면서 번 돈을 다른 애들은 화장품 사고 옷 사고하면서 예쁘게 하고 다닐 때 엄마는 거의 책 사보고 하는데 썼었는데~ 젊었을 때도 젊었을 때지만 엄마가 결혼해서 어디 잔치 같은 데 간다고 좀 화장을 해보려고 해도 젊었을 때 안 해 버릇하니까 못하겠더라 ~ 나는 오십 다 돼서 알은 거를 니는 어떻게 벌써 아노 우리 딸 ~ "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
"응, 엄마가 살던 동네는 아주 가난한 동네여서 남자 여자가 그냥 눈 맞아서 애 낳고 살다가 여자가 도망가면 남자 혼자 애 키우고 했던 곳이었어. 엄마가 공장 다니면서 일하면서도 저렇게 사니 혼자 살지 싶어서 혼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주위에서 하도 깝쳐서.."
"큭큭큭 깝친다는 말이 뭐예요?"
"얼른 결혼하라고 말을 많이 한다는 거지, 그래서 선을 봤고 너희 아빠를 만났는데 남자가 일도 하고 특별히 멋 부리는 것도 같지 않아서 내가 오빠가 많으니까 남자도 좀 알지 싶어서 내가 심지가 굳고 남자도 아니까 괜찮지 싶어서 결혼을 했었지."
내가 엄마 인생의 설정에서 살았다면, 엄마와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 같은 느낌이 엄마의 인생 구석구석에서 들었다.
아마, 어릴 적 책 읽는 엄마를 보며 책에 관심을 가졌을 테고,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엄마를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을 테고,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다 보니 입맛도 닮았으리라. 어떤 아이가 내가 자란 방식으로 자란다면 그 아이도 엄마와 나에게 이렇게 동질감을 느끼게 될까?
다른 곳으로 입양 간 쌍둥이 자매가 몇십 년 후에 만나 서로의 비슷한 인생을 보고 놀라듯, 다른 시대로 입양 간 듯한 나와 닮은 엄마를 보며 나의 미래를 생각해본다. 엄마는 나의 오래된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