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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ong Mar 04. 2019

기억과 망각

-할머니의 머릿속에서 나는 사라졌다

기억과 망각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말이다. 기억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망각의 순서는 거꾸로 돌아간다.


할머니는 자꾸만 당신의 어머니와 오빠를 찾는다. 수십 년도 넘은 기억 속 아직 잊지 못한 옛 가족을 찾는다. 망각은 흐르고 흘러 할머니의 어린 시절로까지 내려간 듯하다. 예순두 살의 나이에 첫 손녀를 안은 할머니였다. 나는 정확히 스무여섯 해 남짓 할머니의 기억에 머물렀다. 이제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망각의 시간만이 흐른다. 그 시간을 우리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고, 어머니를 애타게 찾는 할머니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내 기억 속 할머니를 떠올렸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사형제를 키워온 할머니는 딸이 없어서인지 처음으로 손녀가 태어나 기뻐하셨다고 한다. 할머니 댁을 찾을 때면 할머니는 나를 꼬옥 안아주셨다. 어느 때나 변함없이.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건네는 과일을 먹고, 할머니의 방에서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는 내게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 때문인지 초등학생 때 아주 잠깐 장래희망으로 선생님을 써보기도 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꿈꾸게 됐지만, 할머니의 사라진 기억 속엔 선생님이 됐을 내 모습도 있었을까. 사랑한다는 말없이 내어준 할머니의 사랑은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망각은 선명하던 빛방울이 하나 둘 사그라지는 일이다.


망각의 시간 앞에 인간은 무기력하다. 할머니는 망각의 시간이 온다는 걸 알았을까. 이제와 곱씹어본 할머니와의 기억이 이렇게나 또렷한데 할머니는 알지 못한다. 함께한 기억은 쪼개져선 한쪽에만 남았다. 망각의 시간을 지켜보는 일은 곧 기억을 공유하는 상대를 잃어가는 일이다. 그러니 함께 기억의 시간을 걷는 건 그만큼이나 소중한 순간이다. 기억의 시간에 충실할 것, 언젠가 맞닥뜨릴 지 모를 망각의 시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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