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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Aug 11. 2021

터키를 떠나게 된 이유

터키

배움의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


   터키에서 지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영어학원과 도서관이었다. 당시 친구들과 영어 공부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서 우리의 중요한 일과는 공부뿐이었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공부만 하다 보니 고등학생 때 그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 갔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나의 목표는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 어려움 없이 대화하는 것이었는데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덜 되던 때에 내가 세워둔 목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어를 쓰면서 알파벳부터 배우던 나와 내 친구들이 서로의 생각을 막힘없이 다른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을 그리 오래 유지하진 못했다. 친한 친구들의 마지막 수업 반인 중상위 반에 올라갔을 땐 같이 시작했던 친구들 중 반이 학원을 떠나 각자 갈 길을 찾아갔고 남아있는 친구들만이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내게는 앞으로 두 개의 클래스가 더 남아있어서 친한 친구들이 졸업을 한다는 게 조금은 아쉬웠지만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서운함을 달랬다. 졸업을 한 후 새로운 클래스에는 전혀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만 있었고 간혹 같이 대화를 하거나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외로움이 슬금슬금 내 마음속 빈 곳을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매일 같이 가던 도서관도 카페도 이제 혼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영어에 대한 흥미마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옆에 사람의 유무에 따라 배움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급히 식을 수 있나 의문스럽고 지금껏 영어를 좋아했던 게 진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친구들의 빈자리로 인해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다 잡는데 딱히 도움이 되진 못했다.


   비록 학원에서의 마지막이 생각한 것과 다른 끝맺음이었지만 정확히 깨닫게 된 것은 있었다. 친한 친구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은 장소에서 내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건 서로 응원해주고 옆자리를 채워주는 친구들 덕분이었다는 것. 그때 만약 같이 공부해주는 친구들이 아니라 매일 노는 걸 좋아했던 친구를 만났다면 내가 목표했던 목표치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 나름대로 또 좋은 경험이 되긴 했겠지만 1년 동안 언제나 나의 옆에서 응원해주고 함께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가주었던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에 여전히 많은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갑작스러운 이사와 나의 무기력함을 알게 된 순간들


출처. 구글 지도

    앙카라에서 두 번의 계절이 바뀐 뒤 내가 머무르게 된 장소도 변화가 있었다. 전혀 가보지도 못하고 친구들을 통해 들은 얘기로는 깐깐한 사람이 가득하다는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카이세리는 터키의 중간에 위치한 도시이다. 생각보다 도시가 작아서 여행객은 거의 볼 수 없고 정말 현지인들과 학생들이 사는 곳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듣던 것과 다르게 누군가에게 보여주려 애쓰는 가식이 없었고 사람들은 따뜻했다.


   처음 이사를 갔을 땐 도시의 골목골목이 조용하고 잔잔한 느낌이라서 앙카라처럼 작정하고 놀러 갈만한 곳이 많지가 않았다. 카페마저도 한국에서처럼 오랜 시간을 친구들과 수다 떨 수 있는 공간보다는 커피를 마시며 간단한 대화를 하기에 좋은 전통 카페들이 많았는데 나에게는 앉아서 글을 쓰거나 생각을 하기에 불편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어서 발길이 잘 안 갔다. 그래서 공부하러 가는 카페마저도 딱 한 군데로 정해져 있었다.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는데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프랜차이즈여서 그 마저도 처음엔 많이 낯설었다.


   오랜 시간을 목표 없이 항상 같은 루틴으로 보내다 보니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이 들었다. 사람이 목표도 목적지도 없이 시간을 흘러 보내게 되면 이렇게 무기력 해지는구나를 깊게 경험하게 된 시간이었다. 한번 무기력에 빠지게 되니 잠깐 벗어나는 듯해도 또다시 무기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 너무 쉬웠다. 현실 도피를 위해 떠났던 여행이 나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잘 견뎌내어 자신의 길을 새로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정말 좋은 도시였지만 나는 그곳에서 나의 것을 찾지 못했다. 다시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그때보단 더 잘 지낼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길을 찾을 수 없다면 도망치는 사람. 아마 이게 나의 본모습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긴 여행의 끝


    한국에서 관계에 의한 피곤함 때문에 떠나왔던 터키에서 안타깝게도 나는 다시 도망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번엔 타인과의 관계 때문이 아닌 나 자신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우울함이 나라는 사람의 세계관을 새로이 만들고 있을 때 쯔음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분명 바보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루 24시간 중 약 10시간을 수면에 낭비했고 나머지 시간은 멍을 때리거나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지? 하는 고민을 하는데에 사용했다. 하루가 24시간인 게 너무 길어서 힘들었을 정도였다. 시간이 이렇게 안 갈 수 있나 하는 생각을 처음 진지하게 해 봤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그나마 발버둥 칠 수 있는 힘은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호주 대학교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나에게 큰 고민은 외국어도 해외살이에 대한 걱정도 아닌 학비였다. 비싼 학비로 유명한 호주 대학을 내가 아무런 서포트 없이 갈 수 있을까? 이 걱정이 가장 앞선던 것 같다.


   포기를 해야 하나 또다시 무기력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갈 때 본능적으로 내가 나의 손을 잡았다. '워킹홀리데이' 일단, 가서 생각하는 거야. 가서 그곳에서 일을 하든 돈을 모으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물에 가려진 하얀 천장을 매일 흐릿하게 보는 것보단 분명 더 나은 방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국어 두어 개 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당시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나는 부모님께 당장 떠나겠다고 말했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셨다. 그때 부모님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살짝 화가 섞여있던 단호한 표정. 갑자기 딸이 아무런 연고지도 없는 해외에서 살겠다고 통보를 하니 나라도 많이 당황스러울 것 같다. 그렇게 며칠 동안 나와 부모님은 대화 하나 없이 집에는 쌀쌀맞은 분위기만 가득했다. 그때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한 발자국도 물러설 의향이 없었다. 터키에서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스스로가 내렸기 때문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님 없다는 말이 있어서일까? 나는 우리 부모님께서 결국 나를 지지해줄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계획에 대한 물음과 함께 도와줄 것 없냐는 말로 하얀 깃발을 들어주셨다. 그렇게 무기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나는 2년 반의 긴 여행을 끝마치게 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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