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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Jun 28. 2021

여행의 시작

터키


여행은 현실적인 고민으로부터 도피하기 가장 좋은 핑계


     해외 생활의 선택권이 주어진 것은 타의적이었지만 내가 출국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관계에 대한 피곤함 때문이었다. 20살의 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많이 힘들어했다. 현재의 나는 감정에 솔직하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내비치면 상대방과의 사이가 멀어질까 봐 걱정을 하느라 관계에서 항상 눈치를 보는 입장이었다. 그런 식으로 관계에 있어 을의 입장을 자처하다 보니 여간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그런 관계의 고민을 어깨에 무거운 짐으로 올려놓고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에 해외 출국을 결정해야 하는 때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그렇게 나는 도피성 출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그 누구도 (심지어 고민을 털어놓았던 친한 친구들 조차도) 나의 출국이 관계에 대한 고된 마음으로 인해 행한 도망인지 몰랐을 것이다. 굳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마음속에는 그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할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고 당시에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힘든 관계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 나의 힘듦을 알고 조용히 응원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때 친구들이 해결되지 않을 고민을 들어주느라 꽤 고생을 했을 것이다. 다만 늦게 온 사춘기로 자아성찰을 하던 때라 나 스스로의 긍정적인 부분보단 못난 부분을 더 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부끄러운 과거들과 출국 전 인사를 하게 되었다. 마치 나의 모든 단점은 한국에 모두 놓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나에게 친구들은 마치 다음 주에 다시 볼 것처럼 인사를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가장한 도피를 시작했다.



여행지의 첫인상이라고 항상 좋을 수만은 없지.


     12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터키는 나에게 가히 충격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5년이 지난 지금도 이스탄불 공항에서의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정말 어딜 가나 보이는 동양인은 하나도 없고, 전부 수염 기른 남성들이나 노랑머리를 하고 있는 여성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왜 그리 놀랄 일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당시 서양 국가는 한 번도 여행해본 적이 없던 터라 어딜 가나 서양인들뿐인 광경은 나에게 신기함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 내가 영어도 터키어도 한마디 할 줄 몰랐던 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으면 내 성격에 마주치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아는 척을 하며 대화를 해보려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신기한 마음은 접어두고 공항에 마중 나와 계신 아빠를 만나러 나갔다. 본가는 이스탄불이 아닌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앙카라로 이동을 해야 했다. 그때는 편한 국내선 비행기가 아닌 버스를 타고 가는 게 조금은 의문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이후로는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버스를 탈 일이 없었고 그때의 기억은 나에게 언젠가 또 할지도 모르는 신기한 경험이 되었다. 그날 내가 본 버스터미널의 분위기는 공항에서 느꼈던 것과 사뭇 달랐고 거기 있던 사람들의 눈빛을 떠올려보면 아마 대부분의 동양인 여행자들은 그 터미널에서 꽤 보기 힘든 존재여서 그랬던 것 같다. 터키는 한국과 다르게 종착역이 아닌 버스 회사를 골라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터미널에 가면 호객행위가 꽤 심하다. 또 수화물을 가는 곳까지 들어주겠다며 친절을 베풀고 나중에는 들어줬으니 돈을 줘야만 한다며 협박하는 사람들도 가득하다. 다행히 나는 궁금한 것은 많지만 의심도 많은 편이라 그렇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있으면 의심의 눈초리가 먼저 나간다. 그 상황에 나는 조금이라도 덜 만만한 외국인처럼 보이고 싶어서 버스를 탈 때 동안 인상을 쓰느라 나중에는 미간이 저릿하기까지 했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 버스로는 약 8시간이 걸린다. 나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 정도 시간쯤은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바뀌는 건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였다. 막상 버스를 타보니 내가 상상했던 버스 여행과는 많이 달랐고, 내가 실망을 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한국처럼 24시간 편의점을 운영하는 휴게소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긴 여행 중 휴게소 하나 없이 8시간을 버스에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한다니.. 너무 곤욕스러웠다 (다행히 중간에 한번 일을 보다 야생동물과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어두컴컴한 공중화장실에 내려주기는 했다). 잠이라도 청할까 싶었지만 이미 비행기에서 12시간 비행을 하며 계속 잠을 잤던 터라 그다지 잠을 자는 것도 여행시간을 단축시킬 좋은 해결책이 되진 못했다.


    그렇게 오래 걸려 도착한 앙카라는 춥고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쯤이었는데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시내도 사람은커녕 닫은 상점들뿐이었다. 우리는 택시를 불러서 집으로 향했는데 우리가 앙카라에서 살던 아파트는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고, 그 언덕은 시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지 않은 탓에 눈이 약 10센티가 쌓여서 언덕 중간쯤에서는 우리가 탄 택시가 앞으로도 가지 못하고 뒤로도 가지 못하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 택시기사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30킬로가 넘는 캐리어를 낑낑 거리며 끌고 올라가야 했다. 어이없게도 그 이후로 내가 터키에 있는 동안 그렇게 많은 눈이 오는 걸 볼 수가 없었다.  



엄마와 오랜만에 하는 인사


    한국에 있었을 때 엄마랑 나는 충돌이 심했다. 근데 그도 그럴 수밖에 없던 게 나는 엄마가 항상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용해서 모든 스트레스나 투정을 엄마한테 풀었고, 엄마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런 모녀간의 불화는 또 다른 스트레스를 낳았고 당시에는 엄마랑 떨어져 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혼자 생활했을 때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혼자라는 마음에 불안감이 엄습하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사람은 엄마였고 통화로만 힘들다 투정 부리다 오랜만에 직접 뵙자니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나를 폭 안아주었다. 그때 늦은 새벽에 깨어있다 문 앞에서 해주신 포옹이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당신께서는 감정 표현에 있어서 무뚝뚝한 분이신데 다른 말씀 없이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와 포옹은 마음이 괜히 뭉클해지는 듯했다. 가족으로부터 받는 말 없는 포옹 한 번이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렇게 엄마와의 여러 감정이 담긴 인사를 하고 오랜 여행으로 지친 몸을 눕히려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와의 인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삶의 시작이라고 느껴서였는지 모르게 싱숭생숭한 마음 때문에 쉽사리 잠을 청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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