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싫어요’와 나의 ‘좋아요’ 사이에서
며칠 전, 아주 소박한 저녁 풍경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꽤 깊은 생각에 빠졌다. 별것 아닌 일을 계기로 말이다.
냉장고에 있던 버섯을 꺼내 올리브오일을 둘러주고, 소금을 살짝 뿌려 달궈진 팬 위에 올렸다. 기름에 닿자마자 버섯이 내는 ‘지잉’ 하는 소리, 은근히 퍼지기 시작하는 향긋한 향. 이건 그저 버섯이 아니라, 그날의 작은 행복 같은 거였다.
나는 쫀득하고 짭짤한 버섯을 너무 맛있게 먹으면서 첫째에게 말했다.
“이거 한 번 먹어볼래? 진짜 맛있어.”
하지만 첫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깐 냄새를 맡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엄마… 이거 냄새 너무 이상해.”
나에게는 향긋한 향이었고, 고소하고 따뜻한 냄새였는데, 아이에게는 이상하고 낯선 냄새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나도 어릴 땐 버섯을 싫어했지.
그때 나는 버섯을 보며 말 그대로 속이 울렁거렸다. 물컹한 식감, 촉촉한 표면, 가끔은 흙내 같은 향까지. “왜 이런 걸 먹지?” 싶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버섯을 아주 사랑스럽게 팬 위에 눕히고, 조심스레 뒤집어주고, 적당히 부드러워졌을 때 아주 경건하게 접시에 옮긴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바꿔버린 걸까?
이건 단순히 버섯 이야기만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갑자기 좋아지거나, 이상하게 불편해지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경험이 삶 곳곳에서 나타난다.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쓴 커피를 왜 마시는지, 무릎 담요를 왜 들고 다니는지, 창밖을 가만히 보는 이유가 뭔지, 그냥 잔소리 같았던 말들이 왜 그렇게 진지했는지.
그런데 어느 날 거울 앞에 선 나는, 엄마가 하던 표정과 말투를 하고 있고, 예전의 내가 “절대 이해 못 하겠다”라고 말했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이상하게 낯설면서도 아주 자연스럽다.
버섯 하나 굽다 이런 생각까지 가는 게 좀 과한 걸까?
하지만 삶이란 원래 이런 사소한 것에서 크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경험 하나를 통해 자신을, 가족을, 과거를, 그리고 조금은 미래를 보게 된다.
버섯이 맛있어지는 나이, 쓴맛을 견딜 수 있는 나이, 기다림이 가능해지는 나이, 관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나이. 그건 단순히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가 ‘시간과 함께 변해온 증거’ 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 우리는 자극적인 맛과 즉각적인 만족을 사랑했다. 달콤한 것, 바삭한 것, 확실한 맛.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미묘한 향, 깊은 맛, 서서히 퍼지는 여운 같은 걸 좋아하게 된다. 그건 아마도 삶에서 경험한 것들이 쌓이면서, 조금은 더 복잡한 맛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취향은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삶의 누적 데이터’ 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본 것들, 견딘 것들, 지나온 것들, 사랑했던 것들, 후회했던 것들이 서로 섞여, 어느 날 우리 입맛에, 생각에, 말투에 묻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제일 또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보며 깨닫는다.
“아, 저게 옛날의 나였지.”
그때 내 부모가 느꼈을 당혹스러움, 답답함, 기다림의 무게까지 이제 와서야 조금 이해하게 된다. “이건 결국 다 지나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감정도 든다.
‘아이들이 지금 싫어하는 것이 언젠가 좋아질 때, 아이들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그리고
‘나는 또 얼마나 변해 있을까?’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예전에 이해 못 했던 부모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순간
싫어했던 음식이 어느 날 이상하게 맛있어진 순간
예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 아이를 보며, 혹은 누군가를 보며 ‘저건 분명 내 과거다’ 하고 느끼는 순간
어쩌면 당신도 조금 두려울 것이다. 변해가는 나 자신이 낯설어서, 언젠가 지금의 내가 또다시 낯설게 느껴질까 봐, 그리고 언젠가 나의 현재가 아이의 미래가 될까 봐.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시간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좋은 방향으로만 변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속도로만 변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까?”
“내가 닮고 있는 건 누구일까?”
“내가 아이에게 남겨주고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취향이 변하는 이유는 단순히 몸이 변해서만은 아니다.
삶을 겪어내는 방식이 변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버섯이 맛있어지는 나이는, 아마도 ‘복잡한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다.
쓴 커피가 익숙해지는 나이는 ‘쓴맛이 삶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인 나이’ 일 것이다.
아이를 보며 나를 떠올리는 나이는 ‘나는 혼자가 아니라 이어진 존재라는 걸 아는 나이’다.
“인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몸은 기억한다.” 이 말처럼, 우리는 살아오며 쌓인 경험을 입으로, 마음으로, 눈빛으로 표현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 그 변화는 결코 ‘퇴화’가 아니다. 노화라는 이름으로 단순화하기엔, 그 안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있다.
취향의 변화는 성장일 수도 있다.
감정의 변화는 확장일 수도 있다.
생각의 변화는 성숙일 수도 있다.
시간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통과하며 스스로를 조금씩 조율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이어져 있고, 미래의 나와도 이어져 있다. 부모의 모습에서 내 미래를 보고, 아이의 모습에서 내 과거를 보며, 그 사이 어딘가에 ‘현재의 나’가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괜찮다고. 변해가는 나 자신이 낯설어도 괜찮다고.
버섯을 싫어하던 내가 버섯을 좋아하게 된 것처럼, 어쩌면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수 있다고.
아이들이 지금 나와 다르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 나와 닮아간다고 해서 무조건 불안할 필요도 없다고.
우리는 결국 모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향으로, 조금씩 변해가며 살아가는 존재니까.
“삶은 나를 점점 다른 사람이 되게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꼭 나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이 문장을 나는 마음속에 오래 붙들어두고 싶다. 변화는 두려움이 아니라 과정이고, 노화는 소멸이 아니라 이동이고, 취향의 변화는 붕괴가 아니라 재구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오늘 나는 버섯을 씹으며, 이 낯설지만 따뜻한 인생의 변화를 조금은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 본다. 언젠가 아이도 이 맛을 좋아하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나는 지금보다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겠지. 그게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동시에 꽤 멋진 일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