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끝내고, 나중에 혼자 남는 사람의 이야기
나는 내가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주 사소한 장면들에서 확인한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일상적이라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순간들이다.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넣고 버튼을 누른 뒤 ‘3:00’이라는 숫자가 깜빡이기 시작하면,
나는 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지 못한다.
기다리는 대신 청소기를 꺼내 거실을 한 바퀴 돌고,
정수기에서 물이 차오르는 그 몇 초를 견디지 못해 개수대에 널브러진 컵을 정리한다.
계산대 앞에서는 아직 내 차례가 오지도 않았는데 카드부터 손에 쥐고 있다.
천천히 일을 하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그 속도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결국 내가 나서서 일을 해치워버린다.
그리고 나중에야 깨닫는다.
내가 일을 빨리 끝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을.
이런 장면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고 보면 웃음이 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부지런하고 효율적인 사람 같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고,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남는 틈을 가만히 두지 않고 유용하게 채워 넣는 사람.
나는 오래도록 그런 나를 ‘능력’이라고 믿어왔다.
빨리 판단하고, 빨리 움직이고, 빨리 끝내는 것이 곧 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회가 오랫동안 우리에게 주입해온 미덕이기도 하다.
“시간은 금이다.” “빠른 사람이 살아남는다.” 이런 문장들은 언제나 옳은 말처럼 들린다.
나 역시 그 문장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빠름이 나를 자주 넘어뜨린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워졌다.
천천히 일을 하는 사람보다 실수가 잦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부터다.
나는 항상 ‘느린 사람은 대충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꼼꼼함은 속도와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한 번에 끝내려다 놓치고, 빨리 넘어가려다 다시 돌아왔다.
이미 두 번 할 일을 한 번에 끝내겠다는 욕심이 결국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았고, 가만히 있으면 무능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사람 앞에서 드러났다.
나는 상대방을 잘 기다려주지 못한다.
누군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손이 느린 동안, 말이 더딘 동안
나는 속으로 이미 답을 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일을 다 해버린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다음에 찾아오는 감정은 만족이 아니라 분노다.
‘왜 나만 이렇게 바쁘게 움직여야 하지?’
‘왜 항상 내가 다 떠안아야 하지?’
스스로 선택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타인에게 전가한다.
내가 혼자 다 해버리고는, 혼자 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이 감정은 아이를 키우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양육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 미덕 앞에서 자주 좌절한다.
아이가 스스로 신발을 신는 몇 분, 밥을 먹는 몇 십 분, 숙제를 마치는 그 더딘 시간들이 나에게는 시험처럼 느껴진다.
도와주면 더 빨리 끝날 걸 알면서도, 참아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힌다.
그리고 참지 못한 날에는 부모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자책이 따라온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막상 일상에서는 여전히 속도로 아이를 재단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느긋한 남편과의 갈등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움직인다.
나는 그 모습이 답답해서 대신 결정하고 대신 처리한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서운하다.
왜 나만 이렇게 애쓰는 것 같을까.
왜 그는 늘 여유로운데 나는 항상 급할까.
서로의 속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나의 속도를 ‘정답’으로 여겨왔다.
빠른 사람이 기준이 되어야 하고, 느린 사람은 그에 맞춰야 한다고 믿었다.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항상 다음을 생각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공백이 불안한 사람.
효율적이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다가 어느 순간 지쳐 있는 사람.
사실 우리가 원하는 건 더 빠른 삶이 아니다.
덜 불안한 삶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도 괜찮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누군가의 속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안정감.
우리는 속도를 줄이고 싶은 게 아니라, 마음을 덜 다그치고 싶은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속도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할 때,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반발심이 들었다.
왜 항상 빠른 사람이 손해를 봐야 하지?
왜 효율적인 쪽이 기준이 되지 못하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말은 손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책임에 대한 이야기였다.
빠른 사람은 다음을 향해 움직이고 있고, 느린 사람은 지금의 과정을 밟고 있다.
속도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시선의 방향이 다를 뿐이다.
함께 가기 위해 필요한 건 누가 더 나은가를 정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리듬을 인식하고 그 사이에 속도를 맞추는 일이다.
나는 이제야 그것이 진짜 효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도 맞는다.
조직에서, 가정에서, 관계에서 속도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갈 때 가장 큰 비용은 ‘이탈’이다.
한 사람이 너무 앞서가면, 다른 사람은 따라오지 못하고 결국 포기한다.
빠른 사람이 조금 늦추는 것이 전체를 멈추는 것보다 훨씬 적은 에너지를 쓴다.
심리학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속도 앞에서 스트레스를 느끼고, 관계에서 밀려난다고 느낄 때 방어적으로 변한다.
기다림은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다.
기다려주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안전해진다.
“서두르지 말라. 그러나 멈추지도 말라.” 괴테의 이 문장을 나는 요즘 자주 떠올린다.
급한 성격을 고치겠다는 다짐은 오래가지 않는다.
성격은 고치는 대상이 아니라 다루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방향을 조금 바꿀 수는 있다.
빨리 끝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끝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혼자서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 옆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 앞에서, 배우자 앞에서, 그리고 나 자신 앞에서.
나는 여전히 전자레인지 앞에서 서성일 것이다.
정수기 물이 차오르는 동안 손이 근질거릴 것이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미리 꺼낼 것이다.
아마 이 성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급함이 나를 지켜준 순간도 있었지만, 나를 외롭게 만든 순간도 많았다는 것을.
그래서 요즘 나는 아주 작은 연습을 한다.
일부러 가만히 서 있는 연습, 일부러 기다리는 연습. 누군가의 속도를 존중하는 연습.
속도가 느린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니고, 빠른 사람이 틀린 것도 아니다.
다만 함께 가려면, 빠른 사람이 잠시 숨을 고를 줄 알아야 한다.
이 문장을 여러 번 마음속에 되뇌어본다.
괜찮아, 조금 늦어도. 괜찮아, 함께라면.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오늘도 나는 아주 조금 느려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