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2월 10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 사장 아들로 출생한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학창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안정된 생활을 원하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의학공부를 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렸다.
위생병으로 근무했던 브레히트는 전쟁 후 학업을 중단하고 창작에 전념, 1924년 이후에는 베를린의 ‘도이체스 테아터’ 극단에서 연극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새로운 형식과 소재를 찾던 브레히트는, 인간이 물질로 취급되거나 소외당하는 상황에서 자기실현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화두로 <바알>, <한밤의 북소리>, <도시의 정글에서> 등을 썼다.
1933년 1월, 나치가 정권을 잡자 브레히트는 조국을 떠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자신들의 것과는 다른 견해나 사상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나치 때문에 자기실현이 불가능해진 데 더하여, 인간을 물질로 취급하거나 소외시키는 나치가 절대권력을 가진 이상 그가 찾을 수 있는 해답은 그자들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망명하는 것뿐이었다.
일단 덴마크로 망명하여 희곡 관련 일을 계속하면서 다른 망명자들과 함께 잡지까지 창간했던 브레히트는, 1939년 9월 1일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시발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의 세력이 유럽 전체로 확산되기 전에 미국으로 망명하기로 했다.
스웨덴으로 간 브레히트는 여기서 불후의 전쟁 고발 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 을 완성했다.
1941년에는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마닐라를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 미국 망명에 성공했다.
브레히트는 가족과 함께 할리우드의 산타모니카에 정착하여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등 생활을 위한 창작활동에 전념한다.
독일계 미국인들을 규합하는 단체도 조직하려 했으나 공산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의 갈등 때문에 실패한다.
1945년 5월 나치가 망했고, 같은 해 8월에는 나치의 동맹인 일본 군국주의자들마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하지만 브레히트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1947년 ‘반미(反美) 행위 조사위원회’가 그의 사상과 행동을 추궁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에도 실망한 브레히트는 스위스를 거쳐 분단된 조국으로 귀국했다.
1948년, 브레히트는 극작활동을 최대한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한 동독을 택한다. 물론 브레히트는 동독 정부가 대대적으로 지원한 극단 ‘베를린 앙상블’과 함께 각종 대범한 연극적 실험과 시범연출을 시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