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 매사추세츠 주의 학예도시 보스턴 근처에 있는 브루클라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셉 케네디는 금융계의 거물이자 자산가였고,
존의 위로는 2살 많은 형 조셉 2세가 있었다.
조셉 케네디 2세, 조셉 케네디, 존 F. 케네디
기근과 궁핍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와서 자수성가한 아일랜드인의 자손인 조셉은, 미국 주류 사회에 입성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아들들도 정치계로 진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수백 년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출신들은 미국에서도 ‘하얀 깜둥이(White Niger)’라 불리며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였다.
이런 점은 훗날 케네디가 대통령 재임 때 종교, 인종, 성별, 출신 국가 때문에 차별당하는 일이 없게 하는 인권법(Civil Rights Act)을 발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권법(Civil Rights Act)은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 다음 해인
1964년 7월 2일에 후임자인 린든 B. 존슨 대통령에 의해 통과되었다.
케네디 형제는 태어났을 때부터 “성공하려면 아낌없이 투자하라”와 “투쟁하고 경쟁하고 승리하라!”는 할아버지 때부터의 가훈을 따랐다.
매일 주요 일간지와 잡지를 읽고 식사 시간에는 주요 기사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풋볼과 요트 경기, 수영 등으로 몸을 튼튼하게 단련하면서 경쟁심과 투쟁심을 길렀다.
어머니 로즈는 책을 읽어주어 독서를 취미로 삼게 하고, 사적지 등으로 데리고 다녔다.
이는 케네디가 역사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훗날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역사적인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로즈가 주입한 ‘정치는 고상한 신념’이라는 사고방식도 케네디의 국내 정책 추진의 원동력이 되었다.
1936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케네디는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이때는 아버지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주영 대사로서 런던에 있던 때였다.
그래서 케네디는 형과 함께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당시 전운이 감돌고 있던 유럽을 돌아다녔다.
케네디는 1940년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면서 [영국은 왜 잠들었는가(Why England Slept)]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네빌 체임벌린 전 영국 총리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의 주변국 침략을 눈감아주었던 것을 비판한 글이었다.
22년 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그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몇몇 미국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불만을 산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조셉은 다 큰 아들들을 참전시키면 가문의 격이 높아지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두 형제를 해군에 입대시켰다.
케네디는 어릴 때부터 병약해 군 면제 대상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해군 수뇌부의 지인에게 손을 써 차남을 해군 장교 양성 코스에 넣었다.
케네디가 50여 톤짜리 어뢰정 PT-109의 지휘관으로 배속되었을 당시, 남태평양의 솔로몬 제도(과달카날 섬 주변 바다)에서는 미국과 일본이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1943년 8월 2일, 다른 어뢰정들과 함께 수색 작전을 벌이던 PT-109는 느닷없이 나타난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와 충돌했다.
케네디가 상원의원 선거에 나섰던 1952년 10월경, 아마기리의 함장이던 하나미 고헤이가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편지를 보내왔다.
하나미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작디작은 적함에 놀라 함포를 쏘는 대신 충돌공격을 했다면서 적이었던 케네디의 용맹함을 칭송했다.
물론 이 편지는 케네디의 당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소생(하나미 고헤이)은 1943년 8월에 있었던 솔로몬 제도 해전에서 미국 어뢰정을 격침시킨 구축함의 함장이었던 사람입니다. 이번에 호소노 무레하루 박사를 통해서 그 때 일본 해군에 의해 격침된 배가 귀하의 지휘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놀라게 된 바입니다.
(중략)
1943년 8월 초의 어느 야간전투 중에 저는 적의 대담한 소형함정 한 척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함정은 제가 지휘하고 있는 구축함을 향해서 곧바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두 배는 이미 서로 너무나 가깝게 접근하였기 때문에 포를 쏠 여유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구축함으로서는 그것을 함체로 직접 들이받아 부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그 함정이 마침 귀하의 지휘 아래 있었던 어뢰정인 것을 알고 다시금 놀라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그 전투에서의 귀하의 무서움을 모르는 대담성과 용감한 행동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아울러 그러한 상황 하에서 기적적으로 귀하가 살아 귀국한 일에 대해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귀하도 귀국에서의 선거에서 큰 성공을 거두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 <케네디가의 가정철학>. 오마에 마사오미 지음, 장백일 옮김. page146~147. 범우사. 1985년 1월 20일 3판 발행본. -
PT-109 격침 당시 케네디는 자신의 경력에서 더욱 중요한 일을 벌였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보다 부하들을 구하는 데 더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훗날 그의 막내동생 에드워드가 자동차 사고 때 동승자를 구하지 않아 몰락한 것과 대비된다.
해군 항공대 소속으로 대잠초계기를 조종하던 조셉 2세는 1944년 8월 12일 나치 독일군의 미사일 기지를 폭격하는 아프로디테 작전에 참가 중 전사했다.
아프로디테 작전(Operation Aphrodite)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기종인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보통 폭격기처럼 조종사에 의해 이륙한 뒤 목표 지점 근처에서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 뒤따라오던 아군 군함에 구조되는 동안, 이 기체는 따로 동행하던 폭격기에 의해 무선 조종되어 목표에 충돌하게 된다. 무선 조종되는 비행기 안에는 대량의 폭약과 연료가 탑재되기에 상당히 위험했다.
조셉 케네디 2세도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조셉은 차남이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밀어주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막대한 지원 덕에 케네디는 1960년 미국 대선에서 당선됐다.
1961년 1월 20일에 발표한 그는 취임사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국가가 뭘 해주길 바라기 전에, 먼저 국민 여러분이 나서주십쇼!”
하지만 케네디는 미국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 인류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쿠바 미사일 위기 해소다.
가난과 독재로 고통 받는 인민들을 위해서라며 쿠바 혁명을 일으켜 사회주의국가를 만든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이 자신을 노린다는 이유로 소련의 협력을 구했다.
그러자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쿠바를 지원하는 대가로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소련이 이렇듯 미국의 목에 단검을 들이대자, 미국 정치인과 장군 들이 분노했다.
미군 정찰기가 촬영한 쿠바 내 소련군 미사일 기지와, 쿠바에서 발사될 소련 미사일의표적들
케네디는 “쿠바에 주둔한 소련군을 공격하면 핵전쟁이 발발한다!”고 판단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강대국들 간의 소통 부족 때문에 발발했다고 여긴 케네디는 흐루쇼프와 논의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미국도 소련과 국경을 맞댄 터키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철수시키고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는 과정과, 미국이 평화봉사단 등을 조직해 혹시라도 쿠바처럼 공산화될지 모를 가난한 나라들을 원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한 ‘풍요로운 미국’ 내에서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위해 교육 지원과 의료보험 등 복지 정책, 흑인·여성의 인권 신장 정책 등을 추진했다.
“가난과 차별 같은 불만의 원인이 없어지면 사회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달 탐사 계획 등 인류의 본격적인 우주 진출과 미래를 위한 투자도 케네디의 업적이다.
그러나 케네디는 자신의 업적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볼 수 없었다.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주 댈러스 시에서의 유세 도중 미치광이인 리 하비 오스월드의 흉탄에 저격당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