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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Jul 26. 2024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FDR)

히틀러의  라이벌이자  현대  국제사회의 기반을  만든  지도자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 미국 뉴욕 시 하이드파크의 허드슨 밸리에서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랭클린은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먼 친척 동생이기도 하다.


당시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그랬듯이 프랭클린도 가정교사에게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도련님’이던 프랭클린은 아내가 될 엘리너의 빈민들을 위한 봉사 활동에 따라다니면서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다. 이때 목격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거주지에 대한 기억은 훗날 그의 정책 수립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부인인 엘리너와 함께... 엘리너는 프랭클린의 정치적 경력상 어머니와 다름없는 여인이었다.






프랭클린은 1910년에 민주당 하원의원이 되었고, 1913~1919년에는 해군성 차관보로 활동했다. 1921년에 소아마비에 걸려서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재활치료를 받아 극복했다. 하지만 당시 의술로는 완벽하게 나을 수 없었기에 휠체어를 사용해야 했다.


1928년 뉴욕 주 주지사가 된 프랭클린은 ‘최고의 주지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프랭클린은 1932년 제3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1933년부터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를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히틀러와 루스벨트는 1933년에 지도자가 된 세기의 라이벌이었다. 둘  다  1932년  선거로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의 새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이렇게 주장하면서 실업자들을 위한 공공 사업 정책인 뉴딜 정책(New Deal Policy)을 개시했다.


“좋은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도 풍족하게 사는 나라입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4년 전인 1929년 1월 24일에 뉴욕 주식시장에서의 대폭락 사태로 발발한 경제 대공황은, 유럽 중산층에 비해서도 여유롭던 미국 서민들이 하루아침에 생계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공화당은 “가만히 놔두면 자본주의의 특성상 자연적으로 개선될 것”이라면서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외면해왔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부문 제어 활동을 기반으로 한 뉴딜 정책은 미국을 살렸고, 훗날 미국의 재도약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 예로, 실직자들을 고용하려고 제작시킨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는 태평양 전쟁의 시작부터 막바지까지 일본 함대와 항공대를 파멸로 몰아넣은 ‘미국판 거북선’이 되었다.



뉴딜 정책 추진 때의 공공 공사현장(상)과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진수되는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실업자 구제 대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엔터프라이즈는, 태평양 전쟁 발발부터 끝까지 전쟁에 참가하여 일본군 항공기 911대를 격추하고, 일본군 함선 약 270척을 격침/파손시켰다.






루스벨트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대륙에도 야욕을 뻗치던 일본과 손잡은 나치 독일이 온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것임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년 이상 뒤인 1940년 12월 29일에는 “미국은 ‘민주주의 진영의 군수공장(Arsenal of Democracy)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연설을 했다.


미국 정부는 1941년 3월부터 ‘무기대여법(Lend-Lease)에 따라 다른 연합국들에 무기를 제공했다. 이에 대해 “미국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하는 짓이다!”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루스벨트는 무기대여법을 반대하는 자들을 이런 논리로 설득했다.


지금 우리 이웃집에 불이 났습니다. 당장 물을 뿌릴 고무호스를 빌려달라는데, 호스 값으로 얼마나 줄거냐고 한다면 어느새 우리 집에도 불이 옮겨 붙겠죠! 그러니 ‘나중에 돌려주시오’라면서 빌려주는 겁니다!”


물론 미국 정부는 무기를 공짜로 주지는 않았다.

특히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영국에서는 레이더 등의 핵심 부품인 공동자전관, 제트엔진과 최신 항공기 부품부터 원자폭탄 관련 자료까지 제공받았다.



1941년 12월 8일 자 <뉴스위크>지에 실린

영국에 대한 미국의 항공기 원조 관련  홍보




미국 벨 사의 공장에서 출고된 뒤 소련으로 보내지기 위해 소련 공군 마킹까지 한 P-39 전투기들.



https://www.military.com/history/hormel-kept-scurrilous-file-of-hate-mail-about-spam-world-war-ii-gi

나치독일군에 의해 곡창지대를 점령당하고 산업시설이 파괴당한 소련에 제공된 SPAM 통조림.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 어뢰정 정장이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쿠바 미사일 위기를 벌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정치장교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도 "SPAM을 비롯한 미국산 가공육이 소련군을 먹여살렸었다"고 인정했다.

미국이 지원해준 무기, 탄약, 연료, 식량, 피복 등은 독일과의 전쟁 전에도 궁핍했던 소련군에 단비와 다름없었다.









루스벨트는 1941년 12월 7일에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음 날 국회의사당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일본이 미국에 갑작스럽고 범죄적인 공격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태평양에서의 평화를 위해 대화를 시도했는데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미국인들이 일본군의 비열한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우리 국민들의 투지로 미국은 승리할 겁니다!”


이 연설은 미국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대통령의 말대로 사악한 침략자들을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것이다.



루스벨트는 전쟁으로 단련된 일본군·독일군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해 사기가 떨어진 미군을 질타하고 고무시켰다.


용맹하거나 지혜로운 군인을 적재적소에 배치시켰다.

좁은 항공모함에 대형 폭격기들을 탑재하여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둘리틀 작전을 지휘한 제임스 둘리틀 중령은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폭격기들을 모두 잃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그를 준장으로 특진시켰다.

“국민들의 사기를 고양시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둘리틀은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에서의 항공 지원과, 영국 본토에서 독일을 공격하던 미 제8 공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루스벨트의 기대에 부응했다.



엔터프라이즈의 호위를 받으며 둘리틀 중령의 B-25 폭격기를 이륙시키는 항공모함 호넷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서 히틀러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들은 루스벨트는, 과학자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제공하면서 서둘러 핵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조선인들을 압제하고, 중국인들을 학살하며, 동남아시아인들을 “유럽인들에게서 해방시켜주겠다!”며 속이고 이용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징벌할 무기가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3년 11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또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인 윈스턴 처칠과 장제스를 만난 루스벨트는, 한국을 해방시키기로 결의했다. 그는 이를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으로 재천명했다.



카이로 회담에서의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12일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18(!)일  뒤인  4월  30일에는  히틀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새 대통령이 된 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이미 전임자가 만들어둔 상황 덕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가 전후를 대비해 만들게 한 국제연합(UN)도 5년 뒤의 한국전쟁 등 다양한 범세계적 위기 해소에 큰 역할을 했다.



남편이 만든 UN에서 죽은 남편을 대신해 UN 대사로 활동(1945~1951년)하는 엘리너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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