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 미국 뉴욕 시 하이드파크의 허드슨 밸리에서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랭클린은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먼 친척 동생이기도 하다.
당시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그랬듯이 프랭클린도 가정교사에게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도련님’이던 프랭클린은 아내가 될 엘리너의 빈민들을 위한 봉사 활동에 따라다니면서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다. 이때 목격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거주지에 대한 기억은 훗날 그의 정책 수립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부인인 엘리너와 함께... 엘리너는 프랭클린의 정치적 경력상 어머니와 다름없는 여인이었다.
프랭클린은 1910년에 민주당 하원의원이 되었고, 1913~1919년에는 해군성 차관보로 활동했다. 1921년에 소아마비에 걸려서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재활치료를 받아 극복했다. 하지만 당시 의술로는 완벽하게 나을 수 없었기에 휠체어를 사용해야 했다.
1928년 뉴욕 주 주지사가 된 프랭클린은 ‘최고의 주지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프랭클린은 1932년 제3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1933년부터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를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히틀러와 루스벨트는 1933년에 지도자가 된 세기의 라이벌이었다.둘 다 1932년 선거로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의 새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이렇게 주장하면서 실업자들을 위한 공공 사업 정책인 뉴딜 정책(New Deal Policy)을 개시했다.
“좋은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도 풍족하게 사는 나라입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4년 전인 1929년 1월 24일에 뉴욕 주식시장에서의 대폭락 사태로 발발한 경제 대공황은, 유럽 중산층에 비해서도 여유롭던 미국 서민들이 하루아침에 생계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공화당은 “가만히 놔두면 자본주의의 특성상 자연적으로 개선될 것”이라면서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외면해왔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부문 제어 활동을 기반으로 한 뉴딜 정책은 미국을 살렸고, 훗날 미국의 재도약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 예로, 실직자들을 고용하려고 제작시킨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는 태평양 전쟁의 시작부터 막바지까지 일본 함대와 항공대를 파멸로 몰아넣은 ‘미국판 거북선’이 되었다.
뉴딜 정책 추진 때의 공공 공사현장(상)과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진수되는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실업자 구제 대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엔터프라이즈는, 태평양 전쟁 발발부터 끝까지 전쟁에 참가하여 일본군 항공기 911대를 격추하고, 일본군 함선 약 270척을 격침/파손시켰다.
루스벨트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대륙에도 야욕을 뻗치던 일본과 손잡은 나치 독일이 온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것임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년 이상 뒤인 1940년 12월 29일에는 “미국은 ‘민주주의 진영의 군수공장(Arsenal of Democracy)’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연설을 했다.
미국 정부는 1941년 3월부터 ‘무기대여법(Lend-Lease)’에 따라 다른 연합국들에 무기를 제공했다. 이에 대해 “미국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하는 짓이다!”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루스벨트는 무기대여법을 반대하는 자들을 이런 논리로 설득했다.
“지금 우리 이웃집에 불이 났습니다. 당장 물을 뿌릴 고무호스를 빌려달라는데, 호스 값으로 얼마나 줄거냐고 한다면 어느새 우리 집에도 불이 옮겨 붙겠죠! 그러니 ‘나중에 돌려주시오’라면서 빌려주는 겁니다!”
물론 미국 정부는 무기를 공짜로 주지는 않았다.
특히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영국에서는 레이더 등의 핵심 부품인 공동자전관, 제트엔진과 최신 항공기 부품부터 원자폭탄 관련 자료까지 제공받았다.
1941년 12월 8일 자 <뉴스위크>지에 실린
영국에대한 미국의항공기원조관련 홍보
미국 벨 사의 공장에서 출고된 뒤 소련으로 보내지기 위해 소련 공군 마킹까지 한 P-39 전투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