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에이브러햄 링컨

초강대국 미국의 기반을 만든 지도자

by 장웅진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캔터키 주 농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그의 재능과 열정을 알아본 새어머니 사라 덕에 링컨은 독학과 독서를 계속할 수 있었다.

링컨은 스무 살을 넘긴 뒤부터 아마추어 정치가 겸 변호사로 활동했다.


우리가 아는 링컨 대통령을 만든 여인, 사라 링컨








1858년에 당시 민주당 지도자이자 상원의원이던 스티븐 더글러스와

노예제 관련 공개 논쟁을 벌이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고대 사회의 유물인 노예제를 유지한다면

근대적인 문명국가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링컨도 이렇게 주장하며 노예제를 반대했다.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들 권리는 그 어느 미국인에게도 없습니다!”


남부 사람들은 이런 링컨을 싫어했지만,

링컨은 노예제 폐지를 희망하던 북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Banner-REASE-1860-from-the-presidential-election-campaign-in-186

1860년 선거 당시 포스터.

오른쪽 인물은 링컨 후보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인 HANNIBAL HAMLIN이다.








1860년 11월 6일, 링컨이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다음 달부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시작으로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텍사스 등 총 7개의 남부―노예제 유지―주들이 연방을 탈퇴했다. ‘

아메리카 연방(United States of America: 미합중국)’의 새 대통령인 링컨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새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 나라의 이름은 ‘아메리카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이하 ‘남부’)’이었다.







1861년 2월 18일, 남부 사람들은 미국-멕시코 전쟁의 영웅 제퍼슨 데이비스를

자신들의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링컨은 미국이 분열되면 국력이 줄고 분쟁이 거듭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서 기존의 노예제 유지 주에 정치적 간섭을 하지 않겠다며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이에 대한 남부 측의 대답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 근처의 북군 기지

섬터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1861년 4월 12일 새벽 4시 30분의 일이었다.

뒤이어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버지니아 등도 남부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것이 남부 지도층의 대실수였음이 곧 드러났다.



https://en.wikipedia.org/wiki/Fort_Sumter

남군에 포격을 당하는 섬터 요새.

1812년에 발발했던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뒤 바다에서의 침공에 대비해 건설된 요새였으나,

전혀 엉뚱한 적의 공격에 노출당했다.





남부의 가장 큰 실수는 그들이 ‘원숭이 같은 자’라며 비웃은 링컨의 의지를 얕잡아본 것이다.

남부의 예상과 달리 링컨은 남부 사람들을 달래어 재난을 피하자는 각료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링컨은 국민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미합중국의 파멸이냐, 아니면 피 흘림이냐를 강요받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연합’, 즉 남부를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전쟁 발발 당시 북부는 인구가 백인만 2000만 명이었으며, 유럽으로부터 계속 이민자들이 몰려왔다.

남부는 흑인 노예들을 제외하면 600만 명밖에 없었다.

북군 함대가 해안을 봉쇄하자 남부의 선박들은 오갈 수 없게 되었다.

공장도 북부에는 11만 개가 있었지만, 남부에는 고작 1만 8,000개뿐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북부 출신 기술자들이 떠나자 가동을 중단했다.

남부는 군함에 필요한 증기기관을 제작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결국 북군 함대의 봉쇄망을 뚫고 유럽까지 목화 더미를 수송할 수 있는

몇 척의 밀수선에 무기 보급을 의존해야 했다.




주로 흑인 노예들을 부려 농사를 짓는 경제 시스템으로 돌아가던 남부

북부에서도 농업은 식량 생산을 위해 중요한 산업이었으나,

사이러스 매코믹 등이 생산한 농기계로 농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부에는 가축처럼 부릴 수 있는 노예들이 많다고요?

북부에는 매코믹 씨의 수확기가 있습니다!”

_ 링컨 대통령이 임명한 에드윈 스텐턴 육군장관



https://www.reddit.com/r/WarshipPorn/comments/13k14ci/uss_monitor_vs_css_virginia_march_9th_1862_102

스웨덴에서 이민 온 발명가 존 에릭슨의 장갑함 모니터가 남군의 장갑함 버지니아와

역사상 최초의 장갑함(목재 대신 철갑으로 건조한 군함) 간 해전을 벌이고 있다.

남군은 북군이 철수하면서 불태운 증기군함 메리맥을 수리-개조하여 버지니아를 만들었다.


모니터와의 전투 전, 버지니아는 1862년 3월 8일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공격하던

북군 증기군함들을 파괴하거나 무력화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버지니아는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모니터와 그녀의 자매함들은 남부인들에게서 꿈도 희망도 제거해버렸다.



https://en.wikipedia.org/wiki/H._L._Hunley_%28submarine%29

남군이 개발해 북군 군함을 격침시켜서 "최초의 잠수함에 의한 공격"을 성공시킨 헌리(CSS Hunley)

실체는 수병들이 손으로 크랭크를 돌려 스크루를 움직이는, 갤리선이나 판옥선 같은 인력식이었다.

더군다나 북군 군함 단 한 척을 격침시키자마자 자기 자신도 덩달아 침몰했다.







링컨은 북부의 근대적 산업 인프라로 전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전신기로 백악관에서 전선의 상황을 신속히 전달받고 적절한 명령을 내렸다.

무려 3만 5,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도를 통해

두 달 이상 행군해야 할 곳으로 일주일 만에 군대를 보냈다.

전쟁 중에도 환금작물인 목화 농사에 전념하거나 얼마 안 되던 곡식마저 쌓아두던

남부의 지주들과 달리, 링컨은 기계화 등으로 북부의 곡물 생산량을 늘리고

제때 유통시켜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사이러스 매코믹이 1845년에 만든 수확기. 모니터만큼이나 중요한 "북군의 최종병기"였다.



북군 병사들은 짬밥 메뉴가 너무 단조롭다고 투덜거렸지만,

남군 병사들은 그런 북군 병사들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고기반찬 좀 제대로 만들라는 국군 병사들의 투덜거림을 들어야 하는 북한군 병사들처럼.









남부인들이 "원숭이 같은 자"라며 비웃은,

그러나 원숭이긴 원숭이인데 하필 손오공이었던 링컨에게 부족한 것은

여의봉 같은 우수한 지휘관뿐이었다.


남군에는 로버트 리나 토머스 잭슨 같은 우수한 장군들이 적지 않았다.

유능한 사령관을 찾기 위해 링컨은 사령관을 계속 교체했다.

이 작업은 ‘군인 중의 군인, 장군 중의 장군’인 율리시스 그랜트를 찾을 때까지 계속됐다.



후일 미국 대통령까지 된 율리시스 그랜트




마침내 승리할 기미가 보이자 링컨은 정치적 이유로 미뤄온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흑인들은 기뻐했고, 남부는 혼란에 빠졌다.

링컨의 명령에 따라 북군의 군함들은 남부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소금공장들을 파괴했다.

혹사당하던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고,

덤으로 식량을 보존하거나 가축 사료로도 쓰이는 소금을 남군은 못 쓰게 되었다.



http://www.virginiaplaces.org/geology/salt.html

암염이 녹은 지하수를 퍼내고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는 흑인 노예들

지나치게 혹사당한 결과 소금물이 끓는 솥에 빠져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1863년 7월에 벌어진 게티즈버그의 국립묘지에서

링컨은 이렇게 선언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 해 11월 19일의 일이었다.

이 명언은 오늘날에도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비전으로서 받들어지고 있다.


링컨은 찢겨진 미국을 봉합하기 위해 남부에 자비를 베푸는 정책을 추진했다.

훗날 미국인들은 남부가 북부의 군대가 아니라

‘타인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당연시하고, 나라를 분열시키기까지 한 자들’에게도

관대하고 자비로웠던 지도자에게 패했음을 깨닫게 된다.



게티스버그에서의 연설









남아메리카인들을 스페인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는 이렇게 주장했다.


“남아메리카가 미국처럼 하나가 된다면 최강의 국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나만의 국가’를 만들겠다던

수많은 야심가들을 제압하는 데 실패한 뒤 쓸쓸히 임종했다.

링컨은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의 분리주의자들을 제압해 미국을 초강대국의 기초에 안착시켰다.


그 직후인 1865년 4월 14일 남부를 지지하던 연극배우 존 부스의 암살로

거짓말처럼 지상에서 사라졌다.


https://en.wikipedia.org/wiki/Assassination_of_Abraham_Lincoln


헨리 래스본 소령과 그의 약혼녀 클라라 해리스(상원의원의 딸),

영부인 메리 링컨과 링컨 대통령 그리고 존 윌크스 부스.

원래는 그랜트 장군 부부가 래스본 소령 커플 대신 대통령 부부와의 연극 관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영부인과 그랜트 부인의 사이가 좋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부스는 당시 이름난 배우였기에 그가 링컨 대통령 전용 자리까지 가는 걸 아무도 막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토머스 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