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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페인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지도자

by 장웅진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미합중국의 건국에는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여러 정치인들과 군인들이 관여했다.

이들은 미국 건국 후 지대한 명성과 찬탄을 받았으며, 이들의 위인전도 한국에서 여러 권 출간되었다.


각자 미국을 대표하는 국부, 사상가, 외교관으로 소개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큰 공을 세웠는데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고도 ‘역적’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던 삼봉 정도전과 비슷한 삶을 산 셈이다.

그가 바로 미국의 독립전쟁은 물론 프랑스 대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아버지인 토머스 페인(아래 이미지)이다.





1737년 1월 29일, 영국 노퍽 주에서 코르셋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페인은, 16세 때 해군 함선의 승무원이 되었다.

당시 영국 해군은 적국 상선을 나포하면 그 배와 화물 가격을 정산하여 승무원들의 계급과 공로에 따라 포상금을 주었다.

포상금을 받은 페인은 위험한 바다 생활을 청산하고 런던에 자리를 잡았다.


이 당시 영국 해군의 승무원들 중에는 배에서의 가혹한 생활 탓에 왕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고 평등주의나 공화주의를 따르는 이가 많았다. 페인이 정착한 런던에도 지식을 갈망하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기술자가 적지 않았다.

페인은 고향에서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정도인 문법학교(grammar school)를 다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선원들과 기술자들이 모이는 술집에서 토론회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늘 책을 가까이하며 자기 계발을 했다.




휴식시간에 이야기를 나누는 이 당시 영국 선원들



페인은 학력이 부족해도 독서로 지식과 통찰력을 많이 쌓은 덕에 어느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세무관 시험을 볼 수 있었다. 1768년에 서식스 주 세무서에 부임한 페인은 부유한 담배 상인의 딸과 결혼했고, 장인의 사업까지 물려받았다. 페인에게 정치·사회에 대한 관심과 함께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나서야겠다는 마음이 없었으면 평범한 지역 유지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인은 여가 시간을 술집에서의 토론으로 보냈고, 계속 연습하고 공부한 덕에 연설도 하고 글도 쓸 줄 알았다. 세무서의 동료 직원들이 이런 페인에게 자신들을 대신해 임금 인상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런던의 상관들에게 제출해달라고 했다. 페인은 흔쾌히 응했다. 이는 세무서 측이 페인을 해고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설상가상, 페인이 런던에 있던 동안 담배 사업도 관리 소홀로 망하고, 그의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런던에서 다시 시작하려던 페인을 벤저민 프랭클린이 만나주었다. 그는 ‘총명하고 오지랖 넓은 젊은이’에게 “아메리카로 가게”라고 말했다.

프랭클린의 추천서도 받은 페인은 1774년 10월 훗날 미국의 첫 수도가 될 필라델피아로 가는 배에 올랐다.

프랭클린이 자기 고향에 보낸 이 젊은이는 미국이 보유했던 무기 중 가장 훌륭한 무기가 되었다.






잡지사에서 일하던 페인은 독립전쟁이 발발할 듯하자 “거대한 다민족·다문화 사회이자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아메리카는, 작은 섬나라의 왕과 귀족들의 지배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원고를 썼다

. 훗날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 미국을 이끌 이들마저 “독립? 그건 무리야!” 하며 망설이던 때였다.

1776년 1월에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50페이지짜리 소책자는, 3개월 만에 10만 부 이상 팔렸다.




페인은 인세 수입을 포기할 정도로 [상식]을 널리 배포하면서 아메리카의 독립을 설파했다.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같은 해 12월에는 [아메리카의 위기(The American Crisis)]를 발표했다. 이 글은 조지 워싱턴 휘하 독립군을 고무시켰다. 페인의 글이 영국군의 총과 대포를 무찌르고 아메리카인들에게 자유와 평등, ‘공화국’을 가져다준 것이다.





미국보다 더 장기간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신세였던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거대 국가들이 오늘날에도 미국에 비해 전반적인 국력 면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은 페인의 탁견을 입증한다. 경제력, 군사력, 과학기술력, 산업생산력, 대중의 활력은 정치 체제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기 때문이다.


페인의 사상은 유럽 대중에게도 전파되면서 1789년 7월에 개시된 프랑스 대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페인은 프랑스 대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상식]보다 더 큰 영향력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 [인권(Right of Man)]을 발표했다.






페인은 프랑스 대혁명 덕에 권력자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정권이 재정난을 겪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에게 “프랑스의 미시시피 강 유역 식민지(루이지애나 - 오늘날의 루이지애나 주보다 훨씬 광대한, 미국의 중부 지역 전체)를 사들이십시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제퍼슨은 이로써 미국의 국토를 단번에 두 배로 불린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페인은 이 새 국토에서 노예제가 유지되고, ‘인디언’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의 처우도 개선되지 않자 미국 정부에 실망했다.




현재 미국 지도에 겹쳐진 당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당시 미국의 국토가 2배 확장된 사건이다.미국 국토는 넓어졌어도, 인권의 범위는 확장되지 않았기에 페인은 자괴감들고 괴로웠다



1809년 6월 8일 페인은 뉴욕에서 궁핍함에 시달리다가 쓸쓸하게 사망했다. 왕년의 동지들마저 ‘지나치게 과격해진’ 그를 외면한 뒤였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백성들을 위했던 정도전의 마지막 길과 비슷했다.

다행히 페인의 꿈은 페인이 사망한 날로부터 4개월 전에 태어난 에이브러햄 링컨을 비롯한 후세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토머스 페인의 이상은 그가 죽기 4개월 전에 켄터키 주의 농부 오두막에서 태어난 이 소년에 의해 달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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