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06년 범우사에서 근무하던 시절 이 책을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헤스의 고백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할 때, 이 영어판에 있는 글이 윤형두 회장님께서 주신 일본어판에는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3. Hoess를 "회스"가 아니라 "헤스"(BF-110기 타고 날른 넘의 성인....)로 해야 했던 것에 대해서는... 당시 일반적으로 그렇게 표기되었다는 점을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흐루쇼프가 흐루시초프로, 힘러가 히믈러로, 로멜이 롬멜로(여전히 쓰는 경우가 많지만), 마틴 루서 킹 목사님이 마틴 루터 킹 목사님으로, 힘러가 히믈러로....
4. 2와 같은 사달이 생긴 이유는, 아마도 다른 나라 왕실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일본 왕실의 이미지도 손상시킬 것을 우려한 일본어판 출판사 측에서 제거해서가 아닌가 지금도 생각합니다. 추후 더 확인해본 결과, 회스가 헛소리한 건 아닌가 싶기까지 하네요. 즉, 고위급 귀족 자제(사생아)를 회스가 이렇게 추켜줬다든가 한 거 아닌가 싶기도요.
아울러 이 원고를 출간하라는 지시를 윤형두 회장님에게서 받았을 때 번역자분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고, 일본어판은 무지 낡았었지요
5.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동성애자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타인이 무슨 사상을 가졌든 제게 혹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된다는 게 제 신조니까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대왕께서도 "테베의 신성대(게이 부대) 까지 마!"라고 하셨고....
6. 본 글을 번역해 네이버 블로그와 까페 등에 소개했더니, 나치가 독일을 지배할 때 독일에서 죽은 루마니아 왕족 젊은이는 없었다고들 하십니다. 결론은 아무래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정치깡패짓도 했던 회스가 입벌구짓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내가 말이다, 느그(루마니아인들) 왕자님하고 사우나도 같이 하고, 술도 같이 먹고, 모텔도 같이 간 사이다, 아이가!" 이런 식으로 말이죠.
루마니아 왕자의 남색과 그 비참한 최후
이 점(앞 장에서 언급된 게이 수용자들)과 관련하여 아주 특별한 사례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함께 뮌헨에서 거주하던 루마니아 왕자가 그의 부자연스러운 습관으로 스캔들을 빚은 것이다. 정치적-사회적 고려에도 불구하고, 왕자가 야기한 스캔들은 대단히 과도했다. 그래서 왕자는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끌려왔다. 경찰은 왕자가 지나친 방탕함 탓에 여성과의 쾌락에 싫증나서 새로운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남성들과 관계를 가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힘러(히믈러)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중노동과 엄격한 생활이 왕자를 금방 치유할 것이라 믿었다.
왕자가 도착했을 때, 나는 왕자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왕자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목소리도 흐릿했으며, 행동에도 활기가 없고 마치 춤추는 듯했다. 그래서 왕자가 동성애자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신입 수용자들을 위한 연례행사를 위해 수용소 소장이 왕자에게 거칠게 명령하자, 왕자는 눈물까지 흘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또한 왕자는 ‘부끄럽다는 이유로’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마저 거부했다. 우리는 왕자가 옷을 벗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왕자의 몸 전체는 ― 목에서부터 손목과 발목에까지도 ― 대단히 음란한 그림으로 된 문신으로 도배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묘하기 짝이 없게도 이 그림들은 ― 남자와 여자의 성행위를 포함한 ― 인간의 뇌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타락한 모습들을 묘사했다. 성행위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이 ‘살아있는 그림책’에서 새롭고도 특이한 학습용 자료들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심문 때 왕자는 구대륙과 신대륙의 항구들에서 이 모든 문신들을 획득했다고 털어놓았다.
왕자의 ‘성행위에 관한 그림책’을 ― 기록 보존을 목적으로 ― 경찰이 촬영할 때, 왕자는 성적으로 흥분했으며, 또한 경찰관들이 그것을 건드렸을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고 들었다. 나는 왕자 숙소의 카포(수용자들 중에서 뽑는 내무반장)에게 왕자를 직접 책임지라고, 아울러 왕자가 그의 시야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몇 시간 뒤 나는 이 ‘진기한 수확물’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려고 숙소에 가봤다. 그리고 나는 자기를 임무에서 해방시켜달라고 애걸하는 카포를 만났다. 카포는 왕자가 그를 ‘못 살게’ 군다고 했다. 왕자는 난로 앞에 온종일 서 있으면서 앞을 지나는 모든 것을 노려본다면서 말이다. 누군가가 왕자의 근처를 지나가기라도 하면, 혹은 왕자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고 왕자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왕자는 성적으로 흥분해서는 수음까지 해댄다는 것이었다.
나는 왕자를 의사에게 데리고 갔다. 좀 있다가 의사는 왕자에게 다시 흥분하기 시작한 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의사는 말하기를 왕자는 아주 어렸을 때 아주 강렬한 성적 충격을 경험했으며, 그로인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욕구를 충족시켜줄 그 무엇도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왕자는 이러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의사는 왕자가 강제수용소 대신 요양원에 가야 한다는 소견을 첨부한 보고서를 힘러에게 제출했다. 중노동에 의해 왕자를 치료해보려는 시도는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그 보고서가 힘러에게 제출된 뒤 답변이 올 때까지 기다리던 동안, 왕자에게는 일이 주어졌다. 왕자의 일은 모래가 담긴 수레를 끄는 것이었다. 왕자는 아주 간신히 삽을 들어올렸다. 또한 텅 빈 수레를 끌 때에도 쓰러지기 일쑤였다. 나는 왕자를 숙소로 돌려보낸 다음, 이에 대해 수용소 소장에게 보고했다. 소장은 다음 날에 왕자가 하는 행동을 직접 보고자 했다. 왜냐하면 왕자는 ‘힘러의 명령에 따라’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왕자는 ‘별로 멀지도 않은’ 모래채취장까지 가면서도 계속 비틀거렸다. 물론 일과 관련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로리츠(한때 회스의 상관이었으며 여러 수용소의 소장을 역임하다가 패전 후 소련군에 넘겨지기 직전 자-살)마저도 그가 그 모양임을 인정했을 정도다. 왕자는 다시 숙소로 돌려보내졌고, 곧바로 침대에 눕혀졌다. 하지만 그것 또한 적절한 조치는 아니었다. 왕자는 침대에 누워 쉬지도 않고 자위행위를 했던 것이다.
의사는 왕자가 ‘아픈 아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어떤 방법도 왕자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왕자의 두 손을 묶으려 했지만, 그것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진정제가 투여되자 왕자는 차분해졌다. 그래도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왕자는 갈수록 허약해졌다. 그럼에도 왕자는 다른 수용자들에게 다가가려고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오기까지 했다. 왕자는 결국 힘러가 그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까지 완전히 구속되었다. 이틀 뒤 왕자는 사망했다. 왕자는 죽어가던 순간에도 자위행위를 하고 있었다. 왕자는 총 5주간 수용소에 있다.
힘러는 왕자의 시신을 검시한 후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나도 입회했던 검시에서는 ― 왕자가 육체적으로 대단히 쇠약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 그다지 특이한 점이 없었다. 검시를 주관한 뮌헨 병리학 연구소의 교수는 그가 이 분야에서 아주 오랫동안 일해왔어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본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수용소 소장이 왕자의 시체를 그의 어머니에게 보여주었을 때에도 입회했다. 왕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이 아들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왕자의 통제 불가능한 성적 욕망은 왕자를 구제불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들에게 아들을 보였으나, 그들 또한 왕자를 치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왕자는 그 어떤 요양소에서도 도망쳤다. 심지어 수도원에서 시간을 보내보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는 수도원에서도 버텨내지 못했다. 결국 왕자의 어머니는 절망하여 왕자에게 차라리 자-살하라고 했다. 하지만 왕자는 자-살할 용기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왕자는 겨우 안식을 구했다. 그리고 이는 지금(전범 재판 당시)까지도 나를 덜덜 떨게 할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상 안 멀쩡한 왕자(?)를 봤으니, "비교적" 멀쩡한 왕자들을 보고 안구 정화를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