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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29. 2024

해리엇 비처 스토

노예로 살아가던 흑인들을 해방한 기독교인 여성


해리엇 비처 스토는 1811년 6월 14일 리먼 비처 목사의 13명의 아이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스토가 자라난 집안 환경은 대단히 신실했다. 비록 스토의 신실하던 어머니 록사나는 스토가 5살 때 사망했지만, 스토를 비롯한 그녀의 아이들은 성직자, 교육자, 노예해방운동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스토는 언니 캐서린의 권유에 따라 여성들을 위한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21살 때에는 글쓰기 동호회인 ‘세미콜론 클럽(Semicolon Club)’에 가입했다. 이 클럽에서의 활동 중에 스토는 노예제해방운동가이자 성서문학 교수인 캘빈 스토와 사랑에 빠졌다. 1836년에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는 7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 와중에도 스토 부부는 흑인노예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대표적인 것이 탈주한 노예들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캐나다로 도주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였다.



미국 내 첫 아프리카계 노예는 1619년에 오늘날 버지니아 주의 제임스타운에 도착했다. 당시에는 20명이었다. 이후 흑인노예들은 남북전쟁 당시까지 400만 명 가까이 늘어나면서 미국 남부의 노동력을 지탱했다. 물론 스토 부부가 활동하기 전부터 노예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목소리와 활동은 꾸준히 있었다.







미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토머스 페인은 새로운 조국이 노예제를 없애려 하지 않자 미국의 지도자가 된 옛 동지들과 척을 지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멕시코와의 전쟁이 노예제를 확대하려는 행위라며 시민불복종 활동을 벌였다. 남부 대농장주의 두 딸 세라 무어 그림케와 안젤리나 그림케 자매는 미국의 노예제 관련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고, 이를 호소문과 함께 남부의 기독교도 여인들과 성직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스토도 이 자매들의 글을 공부했다.



하지만 남부에서는 성직자들도 노예제를 옹호했다. 어떤 성직자는 “노예 여러분들이 주인님들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주인님들을 당신처럼 섬기기를 바라십니다!”라고 강론했다. 흑인들은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가 그 패륜 행위 때문에 저주한 아들인 함(Ham)의 자손이기에 다른 두 아들인 셈(Shem)과 야벳(Japheth)의 자손들의 노예로 사는 게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남부의 노예 주인들은 노예제가 노동집약적인 목화와 담배 농사로 막대한 재산을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노예제가 서부로도 확대되면 노예의 가격이 올라가 자신들의 재산도 늘어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북부 사람들은 계몽주의에 따라 노예제를 배격하는 유럽인들이 노예제를 유지하는 미국인들을 미개인이라 여길 것을 염려했다. 이것이 소로가 ‘돈의 노예들’이라고 비판한 북부의 자본가들마저 노예제를 반대한 이유였다.



스토 부부가 노예들을 위해 힘쓰던 시절, 남부 사람들은 300만 명이 넘는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그러나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물론 미국 정부도 1807년부터 노예무역을 금지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북부에서 자유롭게 살던 흑인들을 납치·사기 같은 수법으로 끌고 와 노예로 만들기까지 했다.








남부의 눈치를 보던 미국 연방 정부마저 1850년에 노예의 탈출을 돕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도망 노예 송환법(Fugitive Slave Act)’이 그것이다. 스토는 이 법을 ‘끔찍한 악몽’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틈틈이 썼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노예제폐지론자들의 잡지 <내셔널애러(National Era)>에 기고했다. 1851년 6월 5일부터 무려 40주간 연재된 이 소설을 1852년 3월 존 쥬엣이라는 출판업자가 책으로 만들었다.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의 성직자들을 의식해서인지, 스토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하느님이 쓰신 책입니다!”라고 선언했다.



남부의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어 12년간 노예 생활을 하다 탈출한 북부의 음악가 솔로몬 노섭도 1853년에 수기를 출간했다. 노예 시절에 다른 노예들을 감시하는 역할도 해야 했던 노섭은, “나에겐 톰 아저씨와 같은 ‘기독교인의 용기’가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스토도 [노예 12년]에 다음과 같은 리뷰로 힘을 실어주었다. “솔로몬 노섭 씨가 이야기한 사건들은 톰 아저씨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미국 역사상 정말 놀라운 사건이지요.”









[노예 12년]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소설은 그저 소설일 뿐이다!”라며 일축하거나 “이 소설에 나온 사람들과는 정반대인, 착한 노예 주인이 더 많거든요!”라며 비방하던 남부 사람들의 말이 궤변임을 보여준 자료였다. 아울러 스토의 비평 덕에 ‘자유민이지만 흑인’이 쓴 [노예 12년]은 1856년까지 증쇄를 거듭했으며, 100여 년 뒤에는 재발굴되어 미국 문학계의 고전이자 미국사 연구 자료로서 심도 깊게 연구되고, 영화의 원작도 될 수 있었다.



산업화된 북부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던 노동자들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노예 12년]을 읽고서 노예제의 비인간적인 면과 잔혹함에 주목하고 흑인노예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들이 남부 사람들의 증오를 사던 정치인 에이브러햄 링컨을 지지하면서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11월 25일 아이들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한 스토에게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이 작은 여인이 이 거대한 전쟁을 일으킨 책을 쓰신 분이군요.”






남북전쟁 이후에는 여성 인권 확대를 위한 활동과 저술 활동 등을 해온 스토는, 자신이 한 일을 보고하기 위해 1896년 7월 1일 코네티컷 주의 하트포드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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