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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30. 2024

사이러스 매코믹

'전 세계를 먹여살리는 미국'을 만든 농기계의 왕

유대계 독일인 역사학자 하인리히 야콥은 저서 <빵의 역사>에서 사이러스 매코믹의 업적을 이렇게 소개했다.



“밀을 재배하던 북부의 농민들이 남북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밀밭에 남아있었다면 북부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남북전쟁의 승리와 19세기 후반 내내 미국의 성장을 이끈 것은 농민의 노동력을 보완해준 매코믹의 농기계였다. 그 기계들 덕분에 북부의 농민들은 전선에서 배불리 먹으며 싸울 수 있었다.”



- 사이러스 매코믹이 1845년에 만든 수확기 -



링컨 대통령의 휘하에서 육군장관을 맡은 에드윈 스탠턴도 이렇게 말했다.



“남부에는 가축처럼 부릴 수 있는 노예들이 많다고요? 북부에는 매코믹 씨의 수확기가 있습니다!”




사이러스 매코믹은 1809년 미국 남부 버지니아 주의 부농이자 농기계 연구가 로버트 매코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매코믹은 20대 초반에 아버지의 재산과 연구를 물려받았다. 지난 28년간 아버지가 거듭한 실패부터 연구한 매코믹은, 당시 그의 집 농장의 노예였던 조 앤더슨의 도움을 받아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다.






1885년에 발표된 조 앤더슨의 사이러스 매코믹 관련 인터뷰 내용




18세기부터 유럽에서 유행한 기계인형과 같은 ‘기계농부’를 만들려던 아버지와 달리, 매코믹은 직접 농사를 짓던 앤더슨 덕에 올바른 모델을 기획할 수 있었다.

지난 수천 년간 사용된 농기구인 쟁기처럼 농민들을 도울 기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더구나 이 당시 농민들에게 가장 절실한 기계는 힘들여 키운 농작물이 밭에서 썩어버리기 전에 거둬들일 기계라는 사실도 파악했다.



아버지의 연구 내용을 공부하고, 또 많은 책을 읽은 매코믹은 고대에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대 중동에는 무기로도 사용된 ‘낫을 단 수레’가 있었다.

카이사르가 정복한 갈리아(고대 프랑스)에서도 마차에 칼날을 달아 곡식을 수확하는 데 썼다.

 스코틀랜드의 패트릭 벨이라는 목사가 1825년에 ‘사료로 쓸 풀을 거두어들이는 마차’를 개발했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 패트릭 벨이 1851년에 만든 수확기 -




하지만 이러한 발명품들은 잊혀졌다.

 만들거나 수리하기가 어렵고, 노예나 농노 들을 시켜 농사를 짓는 이들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심지어 벨 목사의 마차는 ‘1명이 12명 몫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실직을 두려워한 일꾼들에 의해 파괴당했다.



매코믹과 그의 수확기는 운이 좋았다. 지나치게 넓은 경작지를 가진 그의 이웃들이 ‘1명이 6명 몫의 일을 할 수 있는’ 시제품 수확기를 좋게 봤기 때문이다.

 서부를 개척해 새로운 경작지를 얻으려는 이들도 늘어나면서 매코믹은 1847년 미국 중서부 지역의 도시인 시카고에 거대한 공장을 지었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농민들을 위해 할부 같은 혁신적 판매 시스템도 고안했다. 구매자가 일정 기간 동안 조금씩 대금을 갚아나가는 이 시스템은 오늘날 미국식 상거래의 상징이기도 하다.



- 시카고에 마련된 매코믹의 수확기 공장 -





매코믹은 수확기의 개량에도 늘 신경을 썼다. 그의 경쟁자들이 자신들의 제품에 만족스러워하며 판매에만 열을 올릴 때, 매코믹은 고객들의 불만을 접수하여 개량을 거듭했다. 결국 그의 경쟁자들은 수확기 관련 특허권을 팔고 은퇴하거나 다른 발명을 모색했다.



매코믹의 수확기는 바다 건너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빅토리아 영국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은 1851년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수정궁(Crystal Palace)에 그의 수확기를 전시하게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이자 프랑스의 새 황제인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종도뇌르를 매코믹에게 수여했다.



- 유리와 강철로 만들어진 박람회장인 수정궁 -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매코믹의 수확기는 링컨과 스탠턴이 주목한 ‘북군의 최종병기’가 되었다.

링컨과 스탠턴은 변호사였던 시절에 다른 수확기 제작자를 위해 재판을 맡게 되었다. 오직 1명만이 막대한 수익이 걸린 변론 계약을 따낼 수 있었기에 두 사람 모두 수확기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었다.



농사를 노예들의 강제노동에 의존하는 남부연합과 달리, 북부에는 스탠턴의 말대로 수확기가 많이 보급되었다.

 북부의 농부 3명 중 1명꼴로 전쟁터에 가자, 지식인들은 이제 곧 곡식이 밭에서 썩어나가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링컨은 전선의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것은 물론, 영국 등 유럽 국가들에도 전쟁 발발 전보다 3배가량의 곡식을 수출했다.



- 풍족한 식사를 하는 북군 병사들 -





그러자 섬유산업의 원료인 목화를 생산하는 남부연합에 호의적이던 유럽의 강대국들도 곡식을 수출하는 북부에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북부의 작은 기차역 마을들도 농촌에서 기차로 실려 온 막대한 양의 곡식을 가공·유통시키는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북군 병사들이 ‘푸짐하지만 단조로운 짬밥’을 불평하는 소리를 저 멀리서 듣던 남군 젊은이들은 항복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농기계의 왕 매코믹’이 사망했던 1884년 5월 13일은 미국이 세계 최대의 곡물 생산 국가가 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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