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웅진 Sep 01. 2024

오빌-윌버 라이트 형제

창공의 개척자


인류가 하늘을 정복할 수 있게 해준 라이트 형제 중 윌버 라이트는 1867년 4월 16일, 오빌 라이트는 1871년 8월 19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턴에서 그리스도 형제 연합교회 소속 성직자 밀튼 라이트의 삼남과 사남으로 태어났다.







그들의 위로는 로이클린과 로린 형제가, 아래로는 1874년 8월 19일에 태어난 여동생 캐서린(사진)이 있었다.


캐서린은 1898년에 오하이오 주의 명문인 오벌린 대학을 졸업한 뒤 데이턴에서 교사가 되었으며, 훗날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마케팅 관련 활동이나 1909년에 설립한 ‘라이트 사(Wright Company)’의 사업을 지원해주었다.

 특히 두 오빠들에게 사회성이 부족하다보니, 그녀가 대변인이 되어주었다.


어떤 이들은 캐서린도 비행기 날개 제작이나 설계 시 계산 작업 등 오빠들의 비행기 발명을 직접 도왔으며, 그렇기에 ‘최초의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삼남매’라는 표현이 올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믿지 마세요!”라고 캐서린  자신이 강력히 부인했다.





라이트 형제는 어릴 때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고, 이런 아들들의 재능을 알아챈 밀튼은  1878년에 프랑스의 알퐁스 페나두가 만든 장난감 헬리콥터를 사다주었다.

고무줄을 동력으로 하는 이 헬리콥터는 훗날 러시아계 미국인 과학자인 이고리 시코르스키가 발명한 진짜 헬리콥터처럼 수직 상승하면서 날아다녔다. 라이트 형제는 이를 모방 제작하면서 사람이 탈 수 있는 비행기를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업이 필요했기에 윌버와 오빌은 직접 제작한 인쇄기를 사용하는 인쇄소를 창업했다.







1890년대에 자전거 붐이 일기 시작하자 형제는 1892년 12월 ‘라이트 형제 자전거 회사’를 창업했다. 자전거 사업이 성공해 큰돈을 만지던 1896년, 형제는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꿈을 다시 불태우게 만든 소식들을 들었다.

하나는 독일의 글라이더 제작자 오토 릴리엔탈(1848~1896년)이 시험 비행 도중 추락해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미스소니언 연구소 소장인 물리학자 겸 천문학자 새뮤얼 랭글리가 1896년 5월 6일에 소형 증기엔진을 장착한 모형 날틀을 날리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우수한 기술자들이었던 라이트 형제는 오늘날 비행기 개발에 필수적인 풍동(風洞)  먼저 개발했다. 풍동은 터널 형태의 공간에 인공으로 일으킨 바람이 통하게 해 물체가 받는 바람의 영향을 측정하는 장치다. 이 풍동 덕에 형제는 그들이 추종하던 릴리엔탈의 글라이더가 ‘날기 어려운 물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라이트 형제는 긴 종이상자를 버리려고 비틀다가 그 변형된 모양을 보고 날개 설계와 비행기 조종법 관련 아이디어를 얻었다. 날개의 모양이 바뀌면 그 주변 공기의 흐름도 바뀌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이로써 비행기 조종에 필수적인 날개의 플랩(flap)과 슬랫(slat), 방향타 등에 관한 개념까지 확보했다.

하지만 형제는 시급히 ‘사람이 조종해서 날아다니는 기계’를 만들어야 했다. 그들이 자문을 구했던 랭글리가 ‘사람이 탄 날틀’을 시험했기 때문이었다.




랭글리의 날틀과 그것을 발진시킬 캐터펄트가 장착된 선박




랭글리의 날틀은 1903년 10월 7일과 12월 8일에 있었던 시험 비행 모두에서 추락했다. 하지만 미 육군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 랭글리는 다음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듯했다.

피 말리는 노력 끝에 라이트 형제는 12월 17일에 비행 실험을 실시했다.




오늘날 미국의 국립항공우주박물관(National Air and Space Museum)에 전시되어 있는 라이트플라이어(Wright-Flyer) 1호(사진)는 날개 폭 12.29미터, 무게 274킬로그램이었으며, 형제가 직접 개조한 12마력짜리 자동차 엔진 한 개를 장착했다. 그 엔진은 자전거용 체인으로 날개 양쪽에 달린 두 프로펠러들과 연결되었다.

이 최초의 비행기에는 ‘카나드(Canard)’라는 보조날개가 달렸다. 이 보조날개는 양력 발생에도 도움이 되지만, 그보다도 이착륙 때 공기의 흐름을 안정시켜 조종사의 안전을 보장해준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키티호크 마을에서 남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킬데빌(Kill Devil)  언덕에서 같은 모양의 글라이더로 여러 차례 실험을 해봤기에 완벽하다 싶었다. 하지만 랭글리의 것과 같은 불상사가 일어날 수는 있었다.

결국 동생인 오빌이 첫 비행에 도전했다.

12초 동안 36미터를 날았을 뿐이지만, 그 12초 동안 오빌 라이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늘을 나는 사람’이 되었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계속 개량하여 1908년에 ‘라이트 모델 A'를 완성시켰다. 이 비행기는 미 육군에 팔렸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가 창공의 문을 열자, 그 뒤는 두 사람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신들의 비행기를 개량하고 미국과 유럽에 팔던 시절, “라이트 형제가 내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자들과 싸우기 위해 출장을 다녀온 윌버는 1912년 5월 30일, 데이턴의 집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에서 더욱 맹렬한 속도로 새로운 걸작 비행기들이 만들어지게 했다.

몸도 마음도 다 지친 오빌은 사업을 정리한 뒤 NASA(미국 항공우주국)의 전신인 NACA(미국 국가항공자문위원회)에서 28년간 활동했다. 물론 미국은 이 형제의 업적을 기억했다. 1936년 미국 과학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s)는 오빌을 회원으로 선출했다.




1939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내내 항공 기술은 거대한 제트 폭격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무섭게 발전했다. 오빌 라이트가 데이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던 1948년 1월 30일, 비행기는 전 세계인들의 생활필수품이 되어있었다.







오빌 라이트가 사망하던 해에 만들어진 B-36 폭격기. 뒤쪽은 크기 비교를 위한 B-29 폭격기

이마저도 곧 B-52 제트폭격기의 등장 등으로 퇴물이 되었다.

이 정도로 비행기의 발전 속도는 빨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까뽀에라(Capoeir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