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따뜻한
나만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아버지는 나를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없었고, 그저 형식적으로 대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서부터 항상 그랬기에 왠지 무섭고 두려웠다. 아버지는 가급적 멀리 피하고 싶었다.
이런 감정들은 성인이 되어서 모두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용서와 사랑보다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망과 증오로 가득 채워졌다. 겉으로는 아버지에게 웃으며 대했지만, 속으로는 거친 마음이 한여름에 잡초처럼 자꾸만 자라나 편치 않았다.
내 삶 속에서 아버지는 왜 그렇게 불편했을까?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지난날 쓰라린 상처가 있었다. 내가 젖먹이 때 어머니와 이혼, 나를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아버지와 떨어진 삶, 중학교 졸업 후 친척집에서 더부살이, 애달픈 공장생활,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던 청춘의 고단한 삶. 어려서부터 이 모든 것들이 얽히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는 켜켜이 쌓여 있었다.
피가 물보다 진해서였을까. 그래도 아버지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그토록 그리웠다. 내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의 진심어린 위로를 받으며 원망과 증오를 하루 빨리 녹이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따뜻한 정을 느끼며 이제라도 지난날의 암울한 굴레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사실 이러한 갈등은 특별히 나만 겪는 게 아닐 게다. 직장이나 단체·친척이나 가족·개인들 사이에서도 종종 화목하지 못하고 갈등이 일어난다. 이런 저런 갈등 속에서도 대부분 이해하고 참으며 파국을 피하려고 하지만, 더러는 심한 싸움으로 번져 관계가 아예 끊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갈등을 너무 마음에 담아 둘 일은 아닌 듯하다.
갈등을 해결하는 길은 오로지 빠른 소통과 진솔한 대화뿐이다. 좋지 않은 감정을 풀고 서로가 화해하는 게 답이다. 말이야 이렇게 쉽게 하지만 이 또한 그리 녹녹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피를 나눈 부모 자식 간에도 소통과 대화가 그리 쉽지 않으니 어찌해야만 화해를 잘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와 응어리진 감정을 풀고 화목하고 정답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어찌해야할지 그 방법을 몰랐다. 어쩌면 간절함이 적었거나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내 자식들이 커가는 만큼 세월은 그렇게 훌쩍 흘러가 버렸다.
내 자식들과 함께 아버지를 여러 번 찾아뵈었다. 그토록 건장하셨던 분이 어느 새 70세를 훌쩍 넘기셨으니, 이제는 영정사진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일이기에 사진을 미리 준비해야 할 것만 같았다.
준비해간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후 보여 드렸더니, 아버지는 얼굴 왼쪽에 있는 커다란 붉은 반점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평생을 함께했던 그 붉은 반점이었지만 지웠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평생 동안 마음속으로 그렇게 지우고 싶었던 게다.
사진에서 반점을 없애는 일은 간단한 일이었다. 포토샵으로 쉽게 수정할 수 있었다. 디자인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수정을 했다.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수정하려니 여러 날이 걸렸다. 포토샵 작업을 마친 후 완성한 사진을 액자에 담아 아버지께 보여드렸더니 흡족해 하셨다. 하지만 여전히 다정한 말이나 칭찬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춘천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위암에 걸렸다는 갑작스런 소식이었다. 고모가 병원에 모시고 가서 검진한 결과 위암 3기말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그토록 건강에 자신 있다고 장담하시던 분이었는데...... 이제는 그 날을 준비해야 하는가..... 점점 다가오는 현실 앞에서 무겁고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바로 찾아뵈었을 때 아버지는 건강해 보였다. 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 중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얼마 후에 또 찾아뵈었을 때는 몸이 예전과 조금 달라 보였다. 그 옛날 무섭게 호통 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제는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가 말했다. 며칠 전에는 대학병원에서 잠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보니 같은 병실에서 항암치료를 받던 사람 3명이 보이지 않더라고 했다. 어제 밤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밤새 안녕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도 밤사이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아버지에게 시간은 곧 생명처럼 소중하다는 게 확연하게 보였다.
얼마 후에 아버지를 다시 찾아뵈었을 때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지난번까지만 해도 외관상 괜찮은 모습이었는데, 그새 하얀 백발·굽은 허리·얇은 피부·앙상한 뼈의 형체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야윈 채 방안에 앉아 계셨다. 신체는 그렇게 야위었어도 정신은 온전했다.
더 늦기 전에 갈등을 풀어야만 했다. 내 가슴 속에 맺힌 쓰라린 감정들을 풀어내고 홀가분하게 머나먼 이별을 준비해야 될 것만 같았다. 내 나이 50세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갈등의 굴레에서 마음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서산에 기우는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아버지이기에 따뜻한 그 손길이 그리웠다. 정서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아버지의 다정한 애정을 느끼고 싶었고, 진심으로 내 손 한 번 따뜻하게 잡아주길 바랬다. 단 한 번의 순간이라도 다정한 아버지를 느끼면서 그동안 고달팠던 내 마음을 녹이고 치유 받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이렇게 마음속에 남아 끈질기게 갈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버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머뭇머뭇 하면서 겨우겨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는...... 아버지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
“단지, 내 손 한번 잡아주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듣고 싶네요.”
“......”
이 말을 하는 게 그리도 어려웠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울먹이며 몇 번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얼굴은 금세 눈물범벅이 되었다. 50여년 쌓여온 감정의 눈물이 복받쳐 올라, 내 마음은 모래성처럼 금방 무너져 내렸다.
깊은 숨을 몰아쉬고 창문밖에 먼 곳을 초점 없이 마냥 바라다보았다. 한 여름의 후덥지근한 더위가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나의 행동에 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감정에 복받친 나의 독백은 방안에 계속 머물며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치고 나니 조금은 진정되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아주 길게 느껴지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머릿속이 멍한 상태가 되고 숨소리를 겨우 느끼기 시작했을 때, 한참동안 고개를 돌리고 벽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그게 쉬운 줄 아니?”
짧은 한 마디 뿐이었다. 아~ 이게 대체 무슨 소리던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아버지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게 너무 어려워서 못했다는 뜻인가? 내 손 한 번 따뜻하게 잡아주는 게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그냥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았을까. 아버지와 화해를 위한 내 작은 꿈은 이렇게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었다.
생의 끝자락에서도 이러한 분이셨다면 나는 어떠했는가. 과연 아버지만 완고했던 것이었을까.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했을까. 이런 자기성찰적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니 마음이 몹시 무거워졌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 시간들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무서운 존재였기에 나는 두려움에 떨었고 가까이 가기를 망설였다. 내가 먼저 아버지를 용서하거나 사랑하지 않았고, 어릴 적 마음 그대로 오랜 세월 변함없이 굳어 있었다. 그 원망과 증오의 단단한 벽을 스스로 허물지도 못했다.
그 사이에 나는 어떻게 행동했던가. 아버지의 마음이 편안하도록 내가 먼저 위로한 적은 있었나? 아버지가 교직에 복직되었을 때, 정말 가슴 뿌듯했다고 말한 적은 있었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느냐고 그만하면 괜찮게 살아오신 거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건넨 적이 있었나?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내가 살갑게 굴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나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누가 먼저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야 했을까? 누가 먼저 다정한 말 한마디를 해야 했을까. 내가 먼저 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야 했다면 그게 언제쯤이어야 했을까. 아버지가 암투병중일 때는 너무 늦었던 것일까. 늦었지만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화답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눈물겨운 감동이 흘렀을까. 아버지의 다정한 손길이 그리웠던 나의 간절한 꿈은 이렇게 미완성에 그쳤다.
아주 머~언 여행을 떠난 지도 벌써 10여년이 지났건만 아버지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무거운 응어리로 남아있다. 아버지의 따뜻한 손을 끝내 잡아보지 못했고, 속 시원하게 화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산소에 들러 크고 작은 잡초들을 뽑는다. 이제는 나 혼자서 원망과 증오의 뿌리를 하나하나 뽑아내며, 스스로 토닥토닥 위로를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못 다한 아버지의 다정한 손길을, 먼 훗날 저 세상에서는 느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