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감사의 추억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 가끔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 전기가 없어 등잔불을 쓰던 시절이다. 이십 리 길을 걸어서 중학교에 가려면 새벽에 일어나야만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에 어두컴컴한 부엌에 들어가 더듬더듬 등잔에 불을 켜고 연탄불을 살피다가 아주 커다란 사고가 일어났다.
연탄불을 들여다보는 순간 시커먼 불길이 확~ 하고 올라와 얼굴 전체를 감싸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냥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악~~”하고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얼굴이 화끈화끈 거리고 머리카락 탄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도대체 어찌 된 된 영문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내가 연탄불을 살피려고 고개를 숙이다가 “툭!”하고 등잔을 건드려 넘어트렸고, 등잔에 들어있던 등유가 그대로 연탄불에 쏟아져 불길이 확~ 올라온 것이었다.
시뻘건 연탄불에 등유를 쏟아부었으니 그 불길의 화력이 오죽 거셌을까. 게다가 그 화력이 내 얼굴을 정면으로 덮쳤으니, 얼마나 몸서리치도록 끔찍한 일이었을까.
얼굴 전체가 화상을 입어 화끈거리고 부어올랐다. 당시에는 병원이 멀기도 했거니와, 아버지는 병원에 갈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응급조치로 소독한다면서 재래식 간장을 얼굴에 발라 주었다. 그리고 약을 사다가 얼굴에 바르고 그날로부터 방에 드러누워 있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누워있는 것이 답답할 즈음이었다. 한진에 계시는 할머니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셨다. 나를 보고는 크게 놀라셨다.
“꿈자리가 워낙 사나워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되어 왔다.”
“애가 이지경이 되었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뭘 했느냐!”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핀잔하듯 말하고는, 곧바로 나를 데리고 한진으로 갔다. 먼 길을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한진에는 약국이 있었다. 당시에 약국은 지금과 달리 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 동네사람들은 약사를 의사라고 불렀다.
김의사가 나를 보고는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면서, 핀셋으로 얼굴 전체에 들뜬 피부를 과감하게 벗겨냈다. 순간 나는 덜컥 겁이 났지만, 김의사의 손놀림에는 거침이 없었다. 얼굴 전체를 완전히 박피한 것이다.
그런 다음 누런색 연고가 묻어있는 촉촉한 가제를 얼굴 전체에 붙이고 붕대로 감아 주었다. 졸지에 머리가 미라처럼 되었다. 그러고는 “햇볕에 절대로 나가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할머니 집에 있으면서 일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더운 날씨에 방에만 누워있으니 답답했다. 한참 뛰어놀기 좋아할 나이에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그 답답함이 오죽했을까. 몇 주가 지난 후에야 겨우 햇볕이 약한 저녁에만 밖으로 나가 놀 수 있었다.
내가 그 모양인 것을 동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엄마 품에 안겨 있던 한 젖먹이가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으앙~” 소리치며 크게 울었다. 이에 놀란 엄마는 급히 손으로 아이의 눈을 가리고 달래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김의사 덕분에 얼굴은 정말 깨끗하게 나았다. 얼굴 전체가 화상을 입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내 평생 말로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고맙고 거듭 감사한 일이었다.
만약에 그때 할머니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김의사의 훌륭한 치료가 아니었다면 내 얼굴은 어땠을까. 들뜬 피부를 벗겨내지 않았으면 얼굴은 이리저리 당겨져 일그러졌을 것이고, 햇빛을 보고 돌아다녔으면 듬성듬성 시커멓게 변했을 것이다.
얼굴에 화상을 입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대부분 그러하기 때문에 유추해서 하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될 뻔했으니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만약에 일그러진 얼굴로 사회생활을 했다면, 주위에서 쳐다보는 부담스러운 시선과 그로 인해 드리우는 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는 어땠을까. 내 인생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 거울 속에 내 얼굴을 보면서 안도감에 떠오른 생각이다.
그러니 김의사는 내게 아주 귀한 은인이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항상 감사한 일이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감사함을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인생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김의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조그만 선물을 준비해서 한진 김의사 댁을 찾아갔다.
약국이 있던 자리에 약국은 없어졌고 허름하게 기울어진 집만 있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다.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김의사는 이미 오래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짠하고 가슴이 아릿하게 느껴졌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엔 너무 늦은 것이다. 마음속에는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왔다. 왜 일찍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왜 좀 더 일찍 찾아뵙지 못했을까. 내 삶이 그토록 생각할 여유가 없었나?
삶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삶 속에 수많은 일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모두가 감사한 일들이다. 주변에 감사하게 생각할 일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불행이라고 말해도, 그 속에서 감사한 일들을 찾을 수가 있다.
오늘은 차분한 마음으로 컴퓨터를 마주 보고 앉아서, 지난날에 있었던 감사한 일들을 입력한다. 삶 자체가 감사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기억할 만큼 감사한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지난날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리며 키보드로 하나하나 컴퓨터에 입력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에 대해 감사하다. 사회적으로 크게 내세울 만큼 자랑스러운 것은 없어도,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 인생을 걸고 도전했던 일에 감사하다. 젊은 날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장생활을 접고 검정고시 시험을 거쳐 대학생이 되었던 일, IMF 외환위기를 겪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경영지도사 자격을 취득하며 경영컨설턴트로 활동하게 된 일에 대해 감사하다.
이제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것이나 성실하게 살아온 것에 감사하다. 허황된 꿈을 꾸지 않았고 스스로 자제해서 감사하고, 남들의 지탄을 받지 않고 위법·탈법 없이 살아온 것에 감사하다. 부유하지 않음에도 탐욕을 부리지 않아서 감사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그리 커다란 부끄러움은 없기에 감사하다.
내 주변에는 감사하고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아내와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미 돌아가셨지만 할머니의 존재는 어머니와 다름없었기에 감사하다. 그리고 군복무와 대학생활을 의탁했던 고모내외분과 지금도 함께 벌초를 하고 종종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는 고종사촌 형님께도 감사하다.
대학생 시절에 많은 가르침을 주시던 오○현 교수님 이○호 교수님 김○견 교수님,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와주던 대학친구 조○형, 가정문제를 상담해 주신 교육청에 한○희 상담사님, 정부 컨설팅 과제를 맡겨주신 김○광부장님,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신 이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감사하다. 봄이면 매화와 장미꽃, 가을이면 국화와 단풍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된 나라라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서 감사하다. 한국의 K-POP 문화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고, 남한을 자유롭고 살기 좋게 발전시킨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이 모든 것들은 나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감사할 일이다.
내 삶에 감사할 일들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들을 더듬어보니 내가 받은 은혜에 감사할 일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자고로 베푼 은혜는 모래에 쓰고, 받은 은혜는 바위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받은 은혜에 감사함을 표현한 적이 얼마나 있을까. 다시 지난날들을 되짚어본다. 그때그때 감사를 가볍게 표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려서 그럴까? 아니면 표현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오래된 일들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딱히 기억나는 일이 없다 보니, 받은 은혜를 바위가 아니라 모래에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이가 들어 하얀 머리가 생기다 보니 이제야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우리가 살면서 감사를 표현해야 하는 대상이 꼭 사람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만물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감사한 마음을 소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길가에 핀 작은 풀꽃님일지라도.
길가에 피어난
작은 풀꽃님이여,
나에게 기쁨이 되어
고마워요.
그대 얼굴에
미소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이 따뜻해져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