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의미

나의 신앙생활 시작과 경험

by 상록수

결혼 전에 아내와 신앙생활을 약속했다. 프러포즈를 할 때 아내가 내 건 조건이다. 아마도 평소에 마음속으로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프러포즈를 하자마자 아내는 바로 신앙생활을 요구했기에 하는 말이다. 아내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으므로 결혼하면 남편과 함께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게 꿈이었던 게다.


그렇다고 내가 아내와 약속 때문에 억지로 신앙생활 하는 건 아니다. 결혼 전 약속은 결혼과 동시에 무효라는 말이 있지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이어오는 것은 나름대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심오한 깨달음은 아니다. 살면서 그저 나름대로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믿음이다.


교회와 관련해 지난 일들을 되짚어보니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에 소소한 기억들이 있다. 청년시절에는 학업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좌절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교회로 달려갔었다. 마음속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웠기에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했었다.




∥1980.07. 한여름에 아침 6시경이다. 궂은비가 점차 세지더니 소낙비가 억세게 쏟아졌다. 소낙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그냥 달렸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은 눈썹 위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방울방울이 되어 눈동자 앞에서 가물가물 거렸다. 마냥 달렸다. 얼마쯤 갔을까. 고속도로 비슷한 거리다. 민가가 드물어서 자동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렸다. 자전거 페달을 더욱 세게 밟았다. 드디어 어느 동네가 나왔다. 짐작에 송탄인 것 같았다.


저 멀리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교회가 뚜렷하게 보였다. “주님!” 나는 홀린 듯 중얼거리며 교회를 향해 달렸다. 교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는데 눈물이 자꾸만 흘러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주님! 저에게 왜 이토록 시련만 계속됩니까. 저는 하나님의 사랑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까.”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왜, 하나님이 당신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누군가가 반문한다면 대답할 말이 궁색하겠으나, 그동안 나에겐 행복할 조그만 여유조차 없었고 이러한 삶에 좌절할 수도 없었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온몸이 비에 젖어 서서히 오한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앉아서 기도를 드리니 체온이 떨어져 몸이 덜덜덜 더욱 떨렸다. 내가 지금 상황에서 취해야 할 인생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싶었으나 이곳엔 아무도 없었기에 그리는 못하고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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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오랜 세월이 흘렀다. 199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한다. 결혼 후 종교에 대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장비인 PC통신 -요즈음으로 보면 채팅- 이 계기가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PC통신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상대방과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 그가 불교 스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종교에 대해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인간은 왜 종교를 믿나요?” 인간이 종교를 찾게 되는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혹자는 종교를 찾는 이유를 “인간의 존재론적 운명”으로 설명한다. 인간이 태어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의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종교는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심리적 위로를 준다. 아마도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와 같은 의미인 듯싶었다.


사실 어떤 종교의 경전을 읽거나 설교 말씀을 듣는 것보다도 때로는 산에 오르며 자연을 감상하거나 바닷가를 거닐며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듣거나 깊은 계곡에서 울리는 청아한 새소리가 마음에 더 깊은 평안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고 보니 나름대로 종교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감리교·장로교·침례교 등 어떤 종파나 교회에 머물기보다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다니는 편이다.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데 굳이 특정 종파나 교회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지만, 나와 반대로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기에 이에 대해 시시비비를 다투고 싶지는 않다.


삶 속에서 갈등과 번민이 있을 때,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하나님!”을 찾고 기도를 한다. 기도를 하면 정말 하나님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처럼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온다. 주기도문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스르르 잠들기도 한다. 가끔씩 여행을 하면서 산속에 자리 잡은 불교 사찰을 방문해 둘러볼 때에도 비슷한 평안을 느낀다. 이것이 종교적 체험이든 심리적인 요인이든 마음의 평안함을 얻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천주교·불교·이슬람교 등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마음의 평안”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를 한다. 인간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종교의 특성으로 볼 때, 굳이 상대방 종교를 배척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본질적으로, 특정 종교나 종파라고 해서 마음의 평안함을 얻는 데 질적·양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다분히 범신론적인 신앙이다.


그러니 상대방 종교에 마음의 문은 열고 개방적으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2013년 프란치스코 새 교황은 즉위 미사에서 종교의 대통합을 언급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가톨릭·개신교·이슬람교·유대교·불교 성직자들도 다 함께 교황의 취임을 축하했다. 특히 천 년간 분열되어 있었던 그리스 정교회 수장도 참석했다. 세계적으로도 다른 종교에 대해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종교는 사람중심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이 없으면 종교의 존재도 무의미하다. 인간이 존재해야만 종교의 존재도 가치가 있다. 이에 종교인이라면 원수를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상대방 종교에 대한 미움이나 적대감은 갖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종교 자체 및 다른 종교에 대해 반감이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종교에서는 보편적으로 이해·포용·사랑을 말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배타적인 모순이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십자군전쟁과 같은 참혹한 종교전쟁이 있었고, 현재도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종교인이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불교 사찰에 가서 담벼락에 낙서를 하거나 국보급 불교 문화재를 훼손한다. 굳이 부처님 오신 날에 개고기를 먹으러 간다. 이슬람사원을 짓는데 돼지머리를 놓고 공사를 방해한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적인 일들만 놓고 볼 때, 이러한 행동들은 종교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이기적인 편협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갈등 측면에서 보면 종교는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이지만, 유구한 인류역사에서 종교는 계속 이어져 왔기에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종교인은 종교적 대통합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한다. 다시는 언론에서 다른 종교를 비난하거나 위해를 가했다는 보도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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