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운 찔레꽃

떠돌이 성장기

by 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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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니,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나는 엄마의 얼굴도 모르고 엄마의 젖 내음도 모른다. 엄마의 포근한 품에서 피어나는 향기도 모르고, 엄마의 애정 어린 따끔한 회초리의 맛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어본 적도 없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 가장 큰 상처는 엄마 없는 삶이었다. 유일한 기억은 할머니와 고모들이 암죽을 떠 먹여 나를 키웠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엄마로 알았고 정이 깊은 작은 고모는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두 분의 보살핌 덕분에 마음을 붙이고 자랐다.


어려서 나는 장손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 의미를 잘 몰랐지만 무엇인가 대단한 것인 줄만 알았다. 작은 고모가 장터에서 마디호박을 팔아, 책가방·연필통·백구두를 처음으로 사주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초등학생들은 대부분 보자기에 책을 싸고 검정고무신을 신던 시절이었기에, 친구들은 나를 보고 ‘폼쟁이’라고 놀렸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어둠의 기억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 고향 친구들이나 친지들에게조차 꼭꼭 숨기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기억들. 가끔은 자물통을 열고 모든 것들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던 내면의 기억들을 조금 열어본다.


초등학교 1학년쯤에, 할머니는 나를 셋째 할머니 집에 맡기고 어디론가 떠났다. 살짝 굳은 고구마엿을 분유통에 가득 담아 주면서, “조금씩 먹어라. 다 먹을 때쯤이면 할미가 돌아올 거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분유통을 다락 깊숙한 곳에 감춰두고 조금씩 떼어먹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구마엿이 줄어드는 만큼 할머니를 보고 싶은 그리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고구마엿이 밤톨만 한 크기로 작아졌을 때는 차마 먹지를 못했다. 며칠에 한 번씩 분유통 뚜껑을 열어보기만 하고 그냥 닫기를 반복했다. 할머니가 오시면 조금은 남아 있어야만 될 것 같아서 그랬다.


거의 2년이 흘러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쯤에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는 나를 면천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며, “아버지와 정을 붙이고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갑자기 아버지와 새어머니, 갓난아이와 함께 살아야 했다. 내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버지가 너무 무섭고 싫었다. 아버지 인기척만 들려도 가슴이 두근두근 쿵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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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쯤에는 아버지가 고향 인근에 부곡리로 이사를 했다. 할머니와 작은 고모가 사는 고향 한진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매일같이 할머니가 사는 한진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나를 자꾸 아버지 집으로 보냈지만, 나는 그곳이 정말 싫었다. 어느 여름날엔가는 밥을 굶고 학교에서 그냥 잠을 자기도 했다.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할머니 집과 아버지 집 사이를 오갔다.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할머니는 나를 하숙시켰다. 그런데 불과 한 두 달 만에 학교 근처에 하숙비가 싼 집으로 옮겨 주었다. 여기서도 불과 몇 개월을 못살았고, 결국 자취방을 얻어주어 이사를 했다. 당시에 아버지는 이사를 가고, 할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랬던 모양이다.


나는 학비를 못 내 담임 선생님에게 여러 차례 불려 갔다. 아버지에게 학비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여러 번 썼지만 답장은 없었다. 어느 날엔 여러 장의 편지가 한꺼번에 반송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부에 관심은 없었고, 학교는 그저 다니는 것이었다. 겨우 중학교를 졸업했으니, 초등·중학교 시절에 추억은 가슴 아리고 애달픈 기억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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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할머니가 나를 맡겼다. 내 나이와 비슷한 또래 3남 2녀가 모두 학교에 다녔고, 친척집 분위기는 평안했다. 식구들이 심하게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비록 얹혀살고 있었지만 집안이 평안해서 불안한 마음은 없었다.


당시에 친척집은 떡 방앗간을 운영하고 머슴을 두고 농사일을 했다. 나는 떡방아와 농사일을 거들었다. 원동기를 돌리고 피대를 거는 떡방아 일이 매우 위험했지만, 점차 숙련되어 혼자서도 일 할 정도가 되었다. 떡방아 일이 한가할 때는 논과 밭에서 일을 했다.


얼마 후 할머니가 조그만 오두막집을 얻었다. 친척집에서 1.3km 정도 떨어진 곳에 한 칸짜리 집이었다. 밀가루포대 종이를 얻어다가 방바닥과 벽에 여러 겹 덧붙여 발랐다.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에 마음은 행복했지만 생활은 녹녹지 않았다. 친척집까지 걸어서 오가며 떡방아와 농사일을 도왔다. 남의 집 산에 지게를 지고 몰래 올라가 나무를 해와야만 밥을 짓고 방을 따뜻하게 할 수 있었다. 한창 성장기 나이에 험한 일을 하느라 손마디는 굵어졌고, 서투른 낫과 톱질로 손가락에 여기저기 상처와 흉터가 생겼다.


1976년 이른 봄 어느 날이다. 봄 날씨인데도 추웠으니 3월쯤 되는 듯싶다. 할머니가 나를 서울 이문동 가방공장에 취직시켰다. 가방을 만드는 미싱사 옆에서 보조하는 일을 했다. 공장운영이 어려워 삼시세끼 콩나물 뭇국에 밥을 말아먹었다. 공장과 연결된 커다란 방에서 10여 명이 함께 잤다. 잠자리는 국방색 침낭이었다. 침낭에서 잠자는 것은 처음이라 다리가 몹시 저려 한 동안 고생했다. 당시에는 가수 송대관 님의 유행가가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사람들이 모여 합창을 할 때면, 모두들 “쨍 하고” 구절을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목청껏 크게 불렀다. 이렇게 또 몇 개월이 지나갔다.


할머니는 나를 영등포 고척동의 다른 공장에 취직시켰다. 이곳은 선풍기 부품을 주로 생산했고, 선반·연삭·밀링·세이퍼 등의 공작기계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휴일은 한 달에 2번이었는데, 지하 1층에서 일할 때는 밖에 날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숙사에는 20여 명이 함께 잠을 잤고, 숙식도 잘 해결되었다. TV로 권투선수 홍수환의 4전 5기 신화를 보면서 방바닥이 무너져라 뛰며 함성을 질렀던 곳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17년을 살았다. 할머니는 가끔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비는데”라고 하셨다. 내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안타까움에서 하신 말씀이리라.


일기를 쓰면서부터 내 의지대로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비빌 곳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 잃을 것도 없었다. 믿는 구석이 없었기에 굳은 마음으로 성실하게 긍정적으로 살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공작기계 기술을 배우려고 공장에서 일했고 월급을 받으면 은행으로 달려갔다. 이때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그 어떠한 꿈을 꾸지도 못했다. 여기까지가 어려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내 기억 속에 삶의 조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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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 집은 왜 가난했을까? 나는 왜 고등학교도 못 가고 떠돌이 생활을 했을까? 사람의 가장 큰 행복은 “방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기에 방랑생활은 정말 싫었다.


할머니가 살던 한진 집이라도 온전히 있었으면 떠돌지는 않았을 텐데.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친척 C에게 재산을 통째로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흙수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흙수저가 된 거였다. 나만 떠돌이가 된 게 아니라 할머니 또한 손 보따리를 들고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며 몇십 년을 그렇게 사셨으니 가슴에 맺힌 원한이야 오죽 깊었을까 싶다.


나에게 좋은 성장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억울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 친척 C에게 묻고 싶다. 탐욕으로 남의 집안 재산 몽땅 가로채고, 행복을 깨트리고 나니 당신은 행복하던가? 자식들에게도 내 것이 아닌 것에 탐욕을 부리고, 남의 눈에 피눈물 나더라도 뺏으라고 가르쳤나? 그러고도 내 자식이 잘되기를 바랐던가? 눈치 빠른 불행이 행복보다 먼저 찾아갈 것을 왜 몰랐던가.


우리 집은 할머니나 아버지 모두가 법적인 것을 잘 몰랐다. 법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친척 C에게 재산을 돌려 달라고 쫓아다니며 하소연을 하고, 수십 년 속앓이만 하다가 흐지부지되었다. 도둑이 도리어 큰소리치는 상황이 되었으니, 너무나 가슴 아리고 피눈물 나는 일이었다.


이 시절 서러운 이야기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직도 울컥 복받치며 올라온다. 이럴 때마다, 우리 가족의 서러운 삶과 아무런 꿈도 없이 허겁지겁 살아야만 했던 삶을 자꾸만 되새기게 된다. 장사익 님의 노래 ‘찔레꽃’의 한 구절을 읊어본다.


하얀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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