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다. 10년 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그랬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참여한 것이 시작이었다. 한겨레21을 구독하고 TV 토론을 보고 진보 지식인의 책을 읽었다. 최초로 지지한 정당은 진보신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정의당 당원으로 있다. 당연히 그 입장에서 쓰인 글이지만 선거와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론이니 거부감 갖지 않아도 된다.
10년간 다양한 정치적 활동을 했다. 글을 쓰고 집회에 꼬박꼬박 나가고 정당에 가입했다. 물론 투표도 했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에 참여했고 2018년 지방선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일반 시민이 아닌 진보 정당 지지자로서 느낀 장벽이 있다. 현실 정치 세력으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항상 무시당했고 동원의 대상으로 취급됐다.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오랜 기간 현장에서 헌신한 활동가들은 모멸감에 속이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단적인 사례로 2010년 서울시장 지방선거가 있다. 당시 진보신당 대표였던 노회찬 후보가 중도 사퇴하지 않고 완주하는 바람에 집단 매도를 당했다. 민주당의 한명숙 후보가 간발의 차로 낙선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오세훈 후보가 47%, 민주당의 한명숙 후보가 46%, 진보신당의 노회찬 후보가 3%를 얻었다. 노회찬 후보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 3가지 층위가 있었다.
첫째, 정당의 존재 이유에 대한 것이다. 정당은 정치적 지향을 두고 결성한 공적 조직이다. 정당이 하나가 아닌 것은 정체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민주당은 자유주의 정당이고 정의당은 사민주의 정당이다.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별개의 정당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 노선이 다른 후보에게 자신들의 패배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를 폐기하는 행태라고 생각한다.
둘째, 여론조사의 효용에 대한 것이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오세훈 후보에게 크게 지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한명숙 후보 측에서 단일화 제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네트워크가 발달하는 등 시대가 변화하면서 정치 여론조사의 설득력은 전 세계적으로 떨어지는 추세다. 여론조사 변수를 예측하지 못한 것도 노회찬 후보의 책임일까.
셋째, 선거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사표론(死票論)이다. 이명박 정권 심판이 대세를 이루는 와중에도 노회찬 후보에게 투표한 3%의 의사표시를 죽은 의사표시로 보는 것이다. 사표론에는 정치 철학의 문제와 제도적인 문제가 맞물려 있다.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과 소선거구제다.
마키아벨리즘은 권력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마키아벨리스트의 세계관은 일단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당의 유시민 前 장관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찍는 표는 사표’라고 주장했다. 언론인 김어준 씨는 저서 ‘닥치고 정치’에서 ‘진보 정당은 민주당의 종속변수’라고 주장했다. 진보 정당은 권력을 잡는 데 있어 방해되는 존재인 것이다. (‘권력을 잡아야 바꾼다’라는 주장에 반박하자면, 권력을 잡은 이후의 방향성에 대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자유주의자와 좌파 사이의 간극이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만 봐도 그렇다.)
사표론의 구체적 행동강령이 ‘비판적 지지’다. 소수 정당의 득표는 어차피 죽은 의사표시가 되니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 그 가운데 비교적 성향이 가까운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자는 것이다. 진보 정당 지지자에게 강제된 프로그램이다. 민주당을 ‘비판적 지지’하지 않으면 ‘이념에 경도된 비현실적 진보’라는 딱지가 붙는다. 딱지 붙이는 사람들은 비판적 지지가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유권자의 적응 행동이라며 합리화한다. 그렇다면 투표의 의의는 오직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있는가. 내 손으로 당선시키지 못하면 무의미한 것인가. 그렇게 따지면 유시민 씨는 참으로 ‘무의미한’ 정치 행위를 많이 한 셈이다. 나는 유시민 씨가 정치적으로 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투표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투표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표시하는 수단이다. 개인의 의사표시가 선거 결과에 따라 무의미해진다는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각자의 의지와 윤리를 담아 투표한 것이고 그 사람의 마음은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항구적으로 남는다. 2016년과 2017년 투표장에 가서 투표할 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선거 공학의 관점에서는 소수 정당에 투표하는 행위가 철없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들은 소신과 열망을 투표라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꽃이 투표라면 민주주의의 기초는 존중이다. 모든 의사표시는 동등한 자격과 가치를 가진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의 선택을 두고 사표라고 윽박지르는 건 폭력적인 태도다. 나는 사표론이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판단을 왜곡하는 반(反)민주적 선전이라고 생각한다.
사표론은 여전히 유효한 선거 구호다. 제도적인 이유가 있다. 소선거구제 때문이다. 승자독식 선거제도라고 할 수 있다. 51%를 얻으면 49%는 ‘사표’가 되는 제도다. 49%의 의사표시가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의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와 빈약한 비례대표제가 병립하는 형태다. 현행 선거제도가 가진 문제는 득표율과 의석수가 일치하지 않는 데 있다.
예컨대 정의당은 2016년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 7%를 얻었다. 하지만 의석은 전체 의석의 2%에 해당하는 6석이 배분됐다. 득표율과 의석비율이 일치했다면 21석을 얻어 국회에서 독립적인 의사결정권을 갖는 원내 교섭단체가 되었을 것이다. 교섭단체는 진보 정당의 오랜 염원이다. 정치 세력으로서 임계점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선거제도 때문에 15석을 손해 보고 성장할 기회를 잃었다. 선거제도라는 유리천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87년 ‘일로삼김’의 합의가 있다. 노태우는 TK, 김영삼은 PK, 김대중은 호남, 김종필은 충청을 갈라먹었다. 지역주의에 기초한 제도다. 확고한 지역 기반이 있어야 유리하다. 지역 독점 정당, 특히 인구가 많은 지역을 독점하고 있는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는 구조다. 지역 기반, 정당 규모에 따라 지지율과 의석 사이에 격차가 발생한다. 정당 간의 계층 이동이 불가능하다. 지역을 배타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이익단체의 성격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영남이든 호남이든 마찬가지다. 지방 토호가 지역구를 장악하고 봉건영주와 같은 권력을 누린다.
선거제도의 불합리성은 오랫동안 지적되었지만 바뀌지 않았다. 지역주의 제도의 수혜를 입는 정당이 선거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1당이 지역을 싹쓸이하는 선거제도에서는 아무리 국민적 여론이 좋지 않아도 안정적인 의석이 보장된다. 소선거구제는 거대 정당의 절대 기득권이다. 지역주의 청산에 정치 인생을 걸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대연정’까지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지금처럼 지역 패권이 흔들리고 정치적 헤게모니가 교체된 상황에서나 개선 가능성이 열릴 정도로 철옹성 같은 제도다.
한국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가 부당한 선거제도에 있다. 정부 형태를 결정하는 권력 구조 개편보다 선거제도라는 의사 반영의 방식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틀이 어떤 모양이든 담기는 내용이 같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현행 선거제도가 존속하는 한 정치 쇄신은 기대할 수 없다. 선거제도 개혁은 공정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얻은 지지율만큼 의석을 점유하는 건 특별한 게 아니다. 상식이다. 득표율이 있는 그대로 의석에 반영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민주적 정당성, 대표의 정확성을 확보하고 전문성과 정책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 선거연령도 국제적 기준에 따라 18세로 하향 조정해야 한다. 개헌은 지방분권 등 직접 민주주의에 접근하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다양성이고 다양성을 담보하는 건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다. 현행 선거제도는 양당제를 강제하고 사회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소수 정당은 의석을 가질 전망이 없기 때문에 사표론과 비판적 지지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이다. 미세먼지를 비롯해 환경문제가 화두인 시점에서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녹색당이 국회에 진출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다원화된 사회의 경향성을 정치적으로 소화하기 위해선 다당제가 필수적이다.
다양한 이념과 노선, 철학을 견지하는 정당이 현실 정치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신이다. 지금까지 정치는 고공에서 시민들의 참여를 저지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당 정치의 문턱이 낮아지면 청년들의 정치 참여를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해적당과 같은 청년정당이 얼마든 나타나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풀뿌리 네트워크 정치가 일상에 스며들고 예비 청년, 10대 학생들은 정치를 뉴스가 아닌 체험으로 학습하게 된다. 정치적 감수성을 획득하고 훈련된 세대가 지속적으로 투입되며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가치는 다양성이다. 획일적이고 수직 서열화된 정신적 체계가 사회를 병들게 한다. 전체주의, 권위주의 문화를 해소하는 형질이 다양성이다. 사표(死票)가 없는 정치, 개개인의 의사표시가 있는 그대로 반영되는 정치, 그리고 이를 통해 다양성을 배양하는 정치가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과 사회 발전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