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어렸을 때 나는 겉과 속이 너무나도 같은 ‘철부지 어린이’였다. 엄마나 선생님께 잔소리나 꾸중만 들어도 ‘울컥’하는 마음에 서럽게 엉엉 울었고, 얼굴에 ‘나 삐쳤음’을 적나라하게 써 붙이고 다녔다. 친구, 동생과 다투거나 하던 일이 너무 버거워 힘이 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조금이라도 가슴 뛰는 설레거나 기쁜 일이 생기면 두 볼에 보조개 우물을 만들고는 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내 얼굴만 보고 그 날 하루 어떤 날을 보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감정 표현에 있어서 솔직한 편이라고 생각하며 지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나름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한 친구가 “다혜 너는 평상시 표정이 좀 무서워. 표정 변화도 많이 없는 것 같아. 기뻐하는 건지 화가 나 있는 건지 가끔 잘 모르겠어.”라며 농담 식으로 말했다. 다소 충격적인 말이었다.
내 고등학교는 전교생이 기숙 생활을 해야 하는 기숙사 학교였다. 이런 학교에 처음으로 입학해서 낯선 환경 속 두려움과 어색함에 나 스스로가 지쳐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된 후 나 자신이 가엽기도 하고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 이후 나는 무의식적으로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을 확인하며 최대한 웃는 얼굴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슬픈 감정은 최대한 감추고 억지로라도 웃으려고만 한 탓에 얼굴은 경직되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웃으면 복이 오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만 믿고 지내다 결국 저 멀리 감춰두고 멀리하려고만 했던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곪아 터져버리고 말았다. ‘기숙사’라는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니 나만의 공간이 사라져 예전과는 다르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은 많이 줄었고, 입학 후 첫 시험에서 너무나도 저조한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결국,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몸도 마음도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약 한 달간 독감을 달고 살며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 나 자신을 놓아 버리고만 싶었다. 결국, 꾹꾹 참아 왔던 서러운 감정 속 슬픔과 분노는 쓰나미가 되어 나를 덮치고 만 것이다.
이후 나는 만사에 귀찮음을 느꼈고 매일매일을 울며 보냈다. 옆에서 누군가 작은 위로라도 해 주면 정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싶었다. 학교 특성상 주말에만 집에 갈 수 있어서 매주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날에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져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툭툭’ 거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우울함의 늪에 빠져 맥없이 가라앉고 있던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여 있던 친구와 나는 그 날 ‘울고 웃기’를 반복하면서 힘들고 속상한 감정을 마냥 짓누르다가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 친구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것이 마치 나 좀 봐 달라고 하는 구걸하는 것처럼 구차한 것만 같고, 누구에게나 다 힘든 고등학교 생활인데 힘든 내색을 하는 것이 창피하다고 말했다. 또 한편 친구는 그렇게 속마음을 감추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속이면 속일수록 서로가 힘만 드는 것 같다며 자책했다.
순간, 나도 나 자신을 견디지 못해 폭발하기 일보직전에 주변 사람들이 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 나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며, 꼭꼭 숨겨 온 감정은 거짓이기에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큰 걸림돌만이 되었던 것이었다. 누군가의 감정이 폭발해 버려 예민해지면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이는 껄끄럽고 살얼음판과 같은 관계가 될 것이며 이는 깨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친구와 나는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며 더이상은 속상하고 힘든 감정을 마냥 숨기려고만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기도 하고 기쁠 때는 배가 아파 눈물이 날 정도로 웃기로 말이다. 이처럼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뒤, 내 내면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 자신을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기분도 한 번 더 생각해보며 그들의 감정에 더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오히려 내 감정에 솔직해지자, 다른 사람들의 감정도 더 잘 보이기 시작했고 더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서로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그 자체는 어쩌면 솔직할 줄 아는 내 마음 가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말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절대 주변 사람들은 나 자신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서로 표현해야 우리는 위로를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힘든 순간들을 견뎌낼 수 있다.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힘들고 복잡한 일들을 조용히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힘든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한다는 것은 굉장히 버겁고 숨이 막힌다. 적절한 독립과 의지가 공존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단단해지고 고비를 넘겨내는 것이다. 이 험난한 세상과 당당히 마주하기 위해,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누군가를 이해해주면서 강인해지고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