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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May 11. 2018

잠깐 앉았다가 나중에 비켜드리면 되지!

임산부 배려석, 비워두길 권하는 이유


▲ 출처 : 뉴시스, 강지은 기자


임산부 배려석은 2013년 12월 서울시 일부 구간에서 처음 도입되었고, 현재 전체 지하철 좌석의 3~4%를 차지하고 있다. 임산부 배려석이 생긴 지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싸고 사람들의 온도 차는 여전하다. 임산부 배려석은 말 그대로 지정석이 아닌 ‘배려석’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임산부 배려석을 꼭 비워두라고 강요할 수 없다.


사실 나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좌석은 꽉 찼고 임산부 배려석만 비어 있다. 그런데 지금 내 주변에 임산부로 보이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임산부가 탑승하면 그때 비켜드리면 되겠다!≫


그러다 우연히 실제 임산부의 고충을 듣게 되었다. 그제야, 곰곰이 스스로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임신과 임산부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은 물론 인식도 낮았다. 그들의 일상을 상상해보는 노력마저 가벼웠다. 분명 그런 나로 인해 불편함을 겪은 임산부가 있었을 것이다.



▲ 출처 : FN파스, 조재형 기자


많은 사람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비어 있으니 잠깐 앉았다가, 나중에 임산부가 오면 비켜야지.’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배려와 효율 모두 충족시키는 합리적인 생각이다.


임신 기간은 평균 38주로 10개월이다. 10개월 중 1~3개월은 임신 초기, 4~7개월은 임신 중기 그리고 8~9개월은 임신 후기로 나누어진다. 임신 초기에 해당하는 1~3개월은 몸의 변화로 인해 구토와 입덧이 시작되고, 몸의 피로가 극심해져 임산부가 고생하는 시기다. 배의 크기와 불편함의 크기가 비례한다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임신 초기는 아직 태아가 완벽히 정착하지 못한 상태라 유산의 위험이 높다. 게다가 아이의 주요 장기(뇌세포, 근육조직, 내장 등)가 이 시기에 대부분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때를 잘못 보내면 아이의 기형 발병 확률이 높아진다. 즉 임신을 하고 있는 10개월 모두 중요하지만, 임신 초기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법적으로 임신 근로시간 단축제를 임신 12주 이내, 36주 이후에 가능하게 해놓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배가 나오는 시기는, 임신 5개월 전후다. 즉 임신 5개월까지는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아서 임산부인지 외관상 알기 어렵다. 재작년, 보건복지부가 일반 승객을 대상으로 임산부를 배려하지 못한 이유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임산부인지 몰라서’(49.4%)가 가장 많았고 ‘방법을 몰라서’(24.6%)가 두 번째, ‘힘들고 피곤해서’(7.9%)가 세 번째 이유였다.


알고 있어도 모르는 사실, 배가 나오지 않아도 임산부일 수 있다.




또, 사람들이 한 가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보통 임산부라고 하면 배 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는 경우만을 생각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임산부’라는 단어는 배 속에 아이를 가진 임부, 그리고 아이를 갓 낳은 산부도 포함한다. 임산부 배려석은 아기를 낳아 배가 들어간 산부도 배려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산부는 출산 후 자궁이 원래 크기로 돌아가면서 아랫배에 고통이 규칙적으로 지속되기도 하고, 분만하면서 치골 부위가 늘어나 이곳에 통증이 오기도 한다. 또한 산후통, 신우염, 부종이나 치골 통증 같은 산후 트러블을 겪는 경우도 많다. 산후 트러블은 체질에 따라 1~3개월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임산부가 오면 비켜드려야지.’라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맨눈으로 임산부인지 알 수 없는 초기 임부와 산후 트러블로 고생하는 산부는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 있어도 양보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임산부가 올 때까지 오매불망 계속 고개를 들고 확인하는 경우는 드물다.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을 하거나 눈을 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임산부 배려석에 대해 많이 하는 말 중,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힘들고 배려받고 싶으면 자리를 비켜달라고 직접 말하면 되지.”인 것 같다. ‘자기건 자기가 챙겨야지.’, ‘그 정도도 못 해?’라는 말이 뒤따라오기도 한다. 이 말은 누구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


실제 임산부들의 경험과 고충을 알고 싶어서, 임신/출산/육아 커뮤니티인 ‘맘스홀릭 베이비’에 가입했다. 맘스홀릭 베이비는 2017년 대표 인기 카페로 선정되어 현재 약 260만 명이 가입되어 있다. 먼저, 카페 내에서 ‘임산부 배려석’으로 검색을 했더니 많은 게시글이 나왔다. 게시글의 대부분은 회원들이 임산부로서 직접 겪은 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임산부들의 최근의 고충을 알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2018년 이후부터 현재(2018년 4월 초)까지의 게시글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임산부 배려 배지를 차고 있었음에도 배려석에 앉아서 계속 폰만 보던 아저씨, 불룩 나온 배를 보고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은 여학생, 강아지 케이지를 임산부 배려석에 올려둔 아주머니, 배가 나온 것이 티가 나지 않아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얘기, 노약자석 앉았다가 할아버지한테 쌍욕을 들은 얘기, 임신한 상태에 애도 한 명 데리고 임산부석 앞에 서 있었는데도 양보 못 받았다는 얘기 등등…




상황을 하나 생각해보자.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임산부가 있다. 이 임산부는 임신 5주 차로 아직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구토와 입덧이 시작되어 몸의 피로가 매우 극심한 상태다. 현재 임산부 배려석에는 어르신이 앉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임산부는 어르신께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겉보기에 임신했다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고작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 젊은 여성이? 만약 배도 많이 나오지 않은 이 여성이 어르신께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하면, 아마 자신의 임신 주차와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으나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극심한 몸의 변화에 대해서 장황히 ‘증명’ 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노력으로 양보를 받는다면 천만다행이다. 커뮤니티 내, 한 임산부는 “나 임산부니까 자리 양보해달라는 말을 차마 못 하겠다고 하더군요. 배가 불룩 나온 것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노약자석도 위와 비슷한 상황이다. 노약자석은 대부분 만 65세 이상 노인들만 앉다 보니 노약자석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이름은 노약자석이 아니라 ‘교통약자석’이다. 현재 전체 지하철 차량 좌석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교통약자는 고령자뿐만 아니라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어린이, 장애인, 환자와 부상자, 무거운 짐을 든 자 등 각종 일시적 교통약자들도 해당한다. 하지만 현재 교통약자석은 노약자석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노인이 아닌 사람이 앉게 되면 가시방석이 되기에 십상이다. 한 임산부는 “티가 나지 않으면 주위의 눈총을 받기도 합니다. 노약자석은 당연히 약자(임산부 포함)가 앉아도 되는 자리지만 어르신이 오면 결국 비켜드려야 하고요.”라고 말했다.


2016년 9월에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있던 임산부가 만취한 노인에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행 및 추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 남성은 자리에 앉아 있던 임산부에게 “왜 젊은 사람이 노약자석에 앉냐”라며 자리를 비키라고 요구했고 임산부는 자신이 임신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성은 “임신 아니면서 임신한 척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임산부의 임부복을 걷어 올리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라 배를 가격하는 폭행도 저질렀다. 임산부들은 작은 충격에도 매우 민감하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양보를 요구하지 못하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할까 봐’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실이 이러니, 임산부들은 위험을 감내하고라도 ‘차라리 서서 가고 말지.’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임산부가 직접 양보를 요구하거나 배려석(임산부 배려석, 교통약자석)에 당당히 앉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보건복지부와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임산부임을 나타낼 수 있는 엠블럼을 개발했다. 이 엠블럼이 인쇄된 분홍색 배지가 바로 ‘임산부 배려 배지’이다.


▲ 보건복지부 공식 엠블럼과 임산부 배지 (출처 : 대전도시철도공사, 국제뉴스)


임산부 배지는 임신 사실을 알리는 일종의 ‘증명’(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슬프지만)이 되기 때문에 확실히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임산부 배지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임산부 배려 배지를 착용했음에도 아직 배지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실효성은 여전히 낮다. 또한, 임산부 배지를 못 본 척한다든지 혹은 무슨 유난이냐는 시선과 뒷담화를 경험한 임산부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정책도 중요하고 프로그램 홍보도 중요하다. 하지만 배려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자리 잡지 않은 곳에서는 슬프게도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결국, “그렇게 힘들고 배려받고 싶으면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하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너라면 할 수 있을 텐데, 왜 너는 못 해? 물론, 내가 실제로 네 입장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혹은 앞으로도 평생, 네 입장이 될 일은 없지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그가 아니기에, 자신이 약자가 아니기에, 그리고 일상 속 불편함과 긴장을 직접 느껴보지 않았기에 쉽게 할 수 있는 권력자의 언어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미치는 곳이 세상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배가 자꾸 앞으로 쏠리다 보니 배를 내밀고 몸을 뒤로 젖히는 자세를 취했는데 이 자세가 등뼈와 골반에 부담을 주어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허리 복대를 차야 생활할 수 있고 걸을 때는 남편의 손을 꽉 잡고 천천히 걸었다. 임산부가 되어 흔들리는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다 보니 허리 통증과 입덧과 구토를 경험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 출처: 뽀얀, 실제 임산부의 임신 후 일상.


앞에서 말했듯, 배의 크기와 불편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배가 불러올수록 넘어지기 쉽고 오래 서 있을 경우 조산의 위험이 크다. 임산부의 불편함과 긴장은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는 임산부를 보호해줄 법률이 많지 않다. 또한, 매년 임산부 배려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지하철 내 안내방송이나 임산부 배려 캠페인 등 홍보를 시행하고 있지만, 임산부 배려에 대한 사회적 의식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임산부 배려석은 우리 사회의 작은 규칙이 되었으면 좋겠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사람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남이 아니다. 나의 언니, 나의 누나의 자리고, 나의 딸의 자리고, 나의 배우자의 자리다.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마크 트레인-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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