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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May 11. 2018

반수 일지

꽤 오랫동안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렸었다. 최근에 어떤 웹툰을 보다가 그런 대사를 봤다. '공부라도 잘 해라, 그럼 최소한 네가 뭘 하든 무시당하진 않을 거다.'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입시켜 온 말이었다. 그때까지 '공부를 잘한다'는 건 '사회에서 알아주는, 소위 명문대라는 곳에 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늦은 때에 이 말을 스스로에게 주입시켰고 너무 늦게까지 새기고 있었다.


나름 괜찮은 학교인데, 애초에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으며 내가 받은 수능 성적에 맞는 대학에 왔는데, 대학을 합격했을 때 축하의 말만큼 많이 들은 말이 "너 반수 할 거야?"였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못한 데에 대한 미련과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크긴 했다. 그래도 그걸 벗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런저런 활동도 많이 했고 다양한 사람들도 만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시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변인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다. 찌질하고 못난 이유지만 결국 가장 큰 이유는 열등감 때문이었다. 가족들이 전부 국내외 내로라하는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사람들이었고, 학벌을 떠나서도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게 뭐?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인데, 라고 생각하는 게 당시엔 잘 안되었다. 그들 중 누구도 내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나는 늘 그 속에서 은근한 소외감과 벽을 느꼈다. 열등감이란 그런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로부터 오는 그런 것.


결국 1학년이 끝난 후, 조용히 휴학을 걸고 수능을 다시 준비했다. 이유는 위의 것 이외에도 꽤나 복합적이었지만 어쨌든 궁극적인 목적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근황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는 학과가 안 맞는다고 대충 둘러댔다. 학벌 콤플렉스만큼 바보 같은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는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그 모순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의치 않은 상황들에서도 나름 열심히 공부했었고, 마지막 사설 모의고사까지 평균 백분위 95% 이상의 괜찮은 성적들을 유지했었다. 그래서 더더욱 두 번째 수능까지 망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과도한 기대와 부담감 때문인지 컨디션 조절을 하지 못했고, 평소보다 한두 등급씩 떨어진 성적을 받았다. 내 시간, 신념, 쌓아왔던 세계가 모두 무너졌다. 패배감에 젖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거의 남은 해 겨울 내내 방에 있었다. 그게 진짜 네 실력이야, 마인드 컨트롤 하나 못하고 머리도 나쁜 거지. 그냥 나는 거기까지였다.


와중에 최저등급을 맞추지 못했음에도 XX대학교 논술고사를 보러 갔었다. 1년 동안 나로 하여금 공부를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목표이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시험이라도 보고 털어버리자 하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읽히지도 않을 답안지를 공들여 써서 제출하고 나왔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가 어떻든 후회는 없다고? 거짓말이다. 최선을 다했는데 최악의 결과를 보는 것만큼 허탈한 일은 없다. 지금이야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그때의 감정이 흐릿해졌으니 "내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으니 후회는 없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엔 정말 죽고 싶었다. 근데 웃기지. 노력에 대한 보상이 따르지 않아서(물론 근본적으로는 맞겠지만)가 아니었다. 우습게도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이 성적으로 다른 학교로 갈아타기에도, 복학하기에도 너무 창피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가고 다시 봄, 막상 복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니 또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친한 친구들은 편입 준비를 하지 않겠냐고 물어왔지만 더 이상 퇴행적인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남들이 앞으로 나아갈 동안 나는 뒤쳐져 있었단 생각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서 일단 앞으로 나가자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학교가 콤플렉스가 되어선 안 돼. 그러기 위해선 내가 더 배우고 더 아는 수밖에 없었다. 나를 둘러싼 외적인 스펙에 구애받지 않을 만큼 지식과 주관을 쌓아 올려야 한다. 다시 복학해서는 전공 공부도 열심히 하고, 다양한 활동들도 찾아 했다. 언제까지 무너져 있을 순 없었으니까. 그렇게 복학한 지 1년이 지나고 나니 성장해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공 성적도 올랐고 생각하는 것도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 누군가에겐 그저 현실과 타협하고 실패를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주변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수능이란 시험에서 결과적으로 두 번 실패했지만 그 시간들이 무의미한 시간들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도전했고, 성장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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