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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May 19. 2018

소설 ⌜ The road⌟ 감상문

마지막 프로메테우스

태초의 불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게 불을 선물로 주었다. 한때 신들만의 전유물이었던 불을 통해 인류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문명을 개척해나갔다. 그 태초의 푸른 은 우리 마음속에 남아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오늘날 그 은 도덕정의감선의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호수에 빠진 아이를 구하거나, 노인과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등의 행동은 우리 사회에서 바람직하고 권장할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보통 그 행동들의 바탕에는 앞서 말한 불의 여러 이름이 있다고 판단된다.


 인간이 이타적 행동, 또는 도덕적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오랫동안 철학에서 다뤄진 주제 중 하나이다.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도덕적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인가,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수많은 답이 존재한다. 가령 인간은 자기 이익만을 욕구할 수 있으며,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가 이타적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타적 행동을 한다는 식의 답이 있다. 이는 우리 마음속에 은 없으며, 그것은 단지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인상을 준다.


 만약, 한 개인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사회가 없다면 어떨까? 우리 내면에 이 존재한다면, 그런 세계 속에서도 을 지킬 수 있을까? ⌜The road⌟는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는 것 같다. 살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아들은 아버지에게 ‘우린 불을 운반하니까요.’라고 종종 말한다. 그들이 운반하는 은 도덕, 의무, 정의감 등의 이름을 지닌,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전해준 바로 그 이다. 나는 이번 글에서 두 사람이 운반하는 에 대한 내 해석을 바탕으로 ‘소설의 배경처럼 멸망한 세계, 자신을 보전하기 힘든 극한 상황에서 도덕, 정의를 지킬 수 있는지, 나아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의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보려 한다. 이를 위해 소설 속 인물들을 분석하고, 몇 가지 상황에 집중하며 이 소설을 바라볼 것이다.




을 외면하는 자, 을 마주하는 자


사회가 사라지고, 멸망한 세계에서 몇몇 생존자들만이 살아가는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살아남은 이들 중 하나인 아버지와 아들은 살아남기 위해 따뜻한 곳을 찾아 길을 걸어간다. 여정 중에 그들은 또 다른 생존자들을 마주한다. 무력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노예로 부리며 살아가는 생존자들, 다른 사람을 식량으로 삼은 이들, 그리고 자신들처럼 위험한 생존자들을 피해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며 살아가는 자들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한다.

 우리는 생존자들을 크게 잔인한 현실에 순응한 이들과 정의감, 양심을 지키려 하는 자들로 나눠 볼 수 있다. 사람을 먹는 이들, 힘으로 노예를 부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잔인한 현실에 순응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반면 ‘아들’은 정의감, 양심을 지키려는 자를 대표한다. 아들은 자신이 죽거나 노예가 될지 모르는 현실을 두려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돕자고 말하며, 나중에 굶을 것을 알면서도 지금 식량을 나눠주자고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아들은 불을 마주하는 자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는 때로는 아들의 부탁을 무시하기도 하지만,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한다. 아버지는 완전히 현실에 순응한, 불을 외면한 자들에도, 도덕적 행동을 지키려 노력하고, 을 마주하는 자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불을 애써 외면하려는 이다. 아들과 자신의 생존에 위협되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자식의 부탁을 무시한다. 반면, 당장은 위협이 없지만, 미래의 생존을 걱정하는 상황에서는 부탁을 들어준다. 아버지가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기준은 바로 당장의 생존 여부이다.


 아버지라는 인물은 당장 생존이 보장된 상황에서는 애써 외면하려다 불을 마주하지만, 그 외의 경우는 망설임 없이 을 외면한다. 예를 들어 괴한이 아들을 인질로 잡은 상황에서 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괴한을 죽인다. 당장 생존이 위협받았기 때문에 살인이라는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행동을 한 것이다.


 하지만 생존이 보장된 상황에서 그는 결단을 내릴 때 현실(남을 돕지 않으면 미래의 생존에 도움이 됨)과 이상(생존이 보장된 상황에서는 도울 능력이 되면 남을 도와야 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자다. 길을 걷다 만난 한 노인을 그냥 지나치려 한 그에게 아들은 식량을 나눠주자고 한다. 그는 망설이지만, 자식의 말에 따라 노인에게 식량을 준다. 그가 준 식량은 둘의 미래 생존에 영향을 준다. 식량 보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음식을 나눠줬다. 갈등하는 한 존재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상을 택한 것이다. 소설 속 아버지의 행동들을 보면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이 존재하며, 그가 을 마주하게끔 강제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을 마주하게 했을까? 극한의 상황에서도 을 마주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 마땅히 을 따르게 할 수 있는 의무가 있다면, 현재의 우리에게도 그 의무를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지킬 수 있는 의무에 대해


 소설 속 아버지를 보면 ‘도덕, 정의에 따라야 한다.’처럼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까지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물론 확실한 생존이 보장된다면 도덕, 정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 의무를 부과한다고 해서 그들이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무언가가 강제로 따르기를 요구하는 의무는 그 강제하는 무언가가 사라지면 사람들이 의무를 따를지가 불분명해진다. 의무의 수용 여부가 확실하려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스스로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결국, 지킬 수 있는 의무는 우리가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의무의 내용은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것들을 고려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아버지처럼 극단적으로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아님에도 도덕적 행동 앞에서 종종 망설인다. 가령 한 달 생활비에 쓰고도 돈이 남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할지, 새로 나온 영화를 보거나 옷을 사는 데 쓸지 고민한다. 생존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도덕적 행동을 망설이는데,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도덕적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반문해보면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한다,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등의 의무는 지켜지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의무는 불가능하다는 회의도 든다.


 하지만 상황과 관계없이, 누구나 받아들이고 지킬 수 있는 의무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고, 앞서 말했듯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것들을 고려함으로써 그것을 찾을 수 있다. ‘남을 도울 능력이 된다면 그들을 도와야 한다.’같은 도덕적 판단과 정의로운 행동을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덕, 정의를 실천할 의무가 없다 해도, 그것들을 잊지는 말아야 할 의무만은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가 도덕적 행동에 대한 생각이 들면 백 퍼센트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 무조건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큼은 반드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형식의 의무는 상황에 따라 준수 여부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무가 준수될 수 있으려면 행위자의 생존이 보장되어야 하고, 동시에 그에게 도덕적 행동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도덕,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것, 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는 마음이 드는 것만큼은 상황과 관계없이 가능하다. 소설의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아들은 식량이 없어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사람만은 먹지 말자고 하고, 힘들어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혼자 떨어져 있는 아이를 데려가자고 하고 길가의 노인에게 식량을 나눠 주자고도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을 반드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한다. 아버지가 생존을 위해 그를 제지하고, 실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유가 있어서 할 수 없었다고 수긍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는 잔인한 현실을 두려워하면서도 도덕 감정, 정의감,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은 잊지 않는다.


 내가 말한 지킬 수 있는 의무(도덕정의를 잊지 말아야 할 의무)는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만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난 이 의무가 수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상황과 관계없이, 생각한 것을 실천할 필요도 없다. 단지 잊지 않으면 될 뿐이다. 하지만 도덕, 정의를 잊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우려가 생길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의무는 현실에 뚜렷한 결과를 낳는 행동의 실천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더욱 나은 방향으로 바뀌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아버지와 아들로 돌아가 보자. 아버지가 한 노인에게 식량을 건넨 것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난 행동이다. 그들이 또 다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반드시 그를 도와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생존에 위협이 되기에 돕지 않을 수도 있고,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음에도 도와주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만이 이런 상황에 부닥친 것은 아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생존한 다른 이들도 얼마든지 이런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그들이 잊지 말아야 할 의무를 준수한다면 언제든 아버지와 아들처럼 ‘어쩌다 한 번’ 도덕적 행동을 실천할 수 있다.


 도덕, 정의가 완전히 잊힌 세상에서 긍정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보다는 도덕, 정의를 잊지 않은 이들이 모인 세상에서 우연히 도덕, 정의가 실현되는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된다. 전자는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는 우연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보장하는, 반드시 지킬 수 있는 의무가 있으므로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다. 작은 ‘어쩌다 한 번’들이 쌓이면 보다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 비록 희박하더라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세상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면 그런 변화가 불가능한 상황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일어난 실천들이 모여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극단적인 세계에서 살아간 아버지와 아들의 행동을 보면, 우리의 내면에는 확실히 이 존재한다. 그 긍정적인 변화를 이뤄낼 수 있는 원동력이자, 세상을 더 밝게 바꿀 가능성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푸르게 타오르고 있으며, 우리가 을 잊지 않는 한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이 가리키는 대로 행동하고, 을 더 크게 키우려 하지 않아도 좋다. 설령 잔불만이 남았다 해도, 그 을 꺼뜨려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항상 이 타오르고 있음을 잊지 말고, 내면의 불꽃을 마주할 의무가 있다. 그 이 타오르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을 보다 밝게 바꿔 갈 가능성을 지킬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초의 프로메테우스가 준 푸른 불을 잊지 말아야 할, 마지막 프로메테우스가 되어야 한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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