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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May 20. 2018

'무기력'한 '젊은 친구들'

 대학생이 되면 ‘통학러’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쓰는 친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통학러’란 자취 또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아닌 집에서 등하교하는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통학+er(영어에서 주로 사람들을 나타낼 때 붙이는 접미사를 의미한다. Ex) foreigner:외국인, speaker:화자, murderer:살인자 등)와 비슷한 형태로 하나의 신조어이자 은어이다. 


 설명이 길었지만 어쨌든! 이러한 장거리 ‘통학러’들의 통학 과정은 다소 험난하다. 대부분 대학교의 1교시는 9시부터다. 지각하지 않으려면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한다. 자체 공강(수업이 있는 날이지만 마음대로 학교에 가지 않거나 수업을 듣지 않는 것)을 과감히 선택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런 날은 손에 꼽을 테니 다들 눈을 뜨는 둥 마는 둥 한 채 출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 몸을 실을 것이다. 많은 사람 틈에 낀 채 파도에 쓸려가듯이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발을 밟거나 발에 밟히기도 한다. 때로는 서로 부딪혀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듣기도 하면서 나름 힘겹게 출근길 전쟁을 겪을 것이다. 나 역시 왕복 약 2시간 40분 정도의 통학 시간을 거쳐 일주일에 두 번은 출근길 전쟁터에, 또 두 번은 퇴근길 전쟁터에 나서며 나름 직장인들의 고충은 얼마나 더 클지를 생각하며 힘겨운 통학러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던 1교시가 있던 어느 날, 늦잠도 안 자고 그 어떤 날보다 상쾌한 기분으로 새벽공기를 마시며 집 밖을 나왔다. 평소보다 일찍 나와서 그런지 지하철 안은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운이 좋으면 30분은 앉아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얼른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왠지 운이 좋을 것만 같았고, 신기하게도 빈자리가 빨리 생겼다. 얼른 그 자리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하던 순간, 어떤 아저씨께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눈 감아도 느껴지는 그런 따가운 눈초리를 말이다…) 살짝 눈을 떠 보니 아저씨는 6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셨다. 자리를 양보해 드려야 하나 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아저씨가 “요즘 젊은 친구들은 뭐만 하면 지쳐가지고…. 무슨 표정만 보면 직장생활 20년은 해 본 것 같다니까…” 하고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리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했다. 누가 봐도 바로 앞에 있는 나를 보고 하시는 말 같았고 화도 아닌 억울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학교생활을 엄청 열심히 하는 것도, 따로 공부나 대외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봐도 지금 내 삶을 굉장히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 그래서 무언가 찔리는 기분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아저씨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었고 순간적으로 멍한 기분만 들었다. 졸음도 순간적으로 확 달아났다. 하지만, 학교에 도착하기까지 ‘힘이 빠져 있는 젊은 친구들’이 무엇인지 계속 곱씹어 보며 잠정적 죄인 같은 기분으로 등교를 했다. 나를 비롯한 젊은 ‘청춘’들이 정말 그 아저씨가 말하는 ‘힘이 빠져 있는 젊은 친구’들로 전락해 버렸는지 말이다.

 우선 내가 살아온 지난 순간을 되돌아보니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엄청난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았다. 친구들이 다닌다는 좋은 학원은 무조건 다니려고 했고 성적을 많이 올린 친구들이 듣고 있는 인터넷 강의라면 무조건 들으려고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주변에 일찍 일어나는 친구들이 있으면 그 친구들보다 일찍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나름 치열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좋은 성적을 받는 친구들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며 열등감에 갇힌 채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갔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직접 찾고 해 볼 것을 나름대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경쟁’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지냈던 나머지 막상 나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기회가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졌고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을 찾아서 해 나가야 할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한다고 하면 괜히 조바심을 느끼고 남들이 한다는 것들을 따라 하려고 하기에 급급했다. 하루하루를 계획적으로 정해진 틀 안에서 보내려고 했고 무엇이든지 계산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결국, 또다시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삶을 사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히 결과는 좋지 않았고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나 자신을 비롯한 주변 모든 사람에게 지치기 시작했다. 나의 삶 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알맹이 없는 공허함만이 맴돌고 있었을 뿐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도대체 젊은 세대들은 왜 이렇게 그 아저씨 말마따나 맥없이 힘든 표정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물론 가끔은 정말 열심히 놀아서 피곤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기력하고 피곤해 보이는 표정 안에는 사회라는 공포영화가 선사하는 공포에 겁먹거나 지쳐 있는 젊은 세대들의 모습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공포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청년 실업률은 올해 처음 두 자릿수에 도달했다는 내용부터 하루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터지는 젊은 여성들의 ‘미투 운동’ 소식과 기업 내 임원들의 ‘갑질’ 논란 이야기까지 사회는 젊은 친구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겁을 주고 있다. 이제 막 몸을 내던져야 하는 ‘사회’라는 곳이 이렇게도 두려운 존재라고 끊임없이 경고하고 겁을 주는데 청년들은 당연히 발을 내딛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부당한 현실에 대해 우리 젊은이들은 맞서 싸우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사회 안에서 젊은 세대들이 일어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오히려 그들에게 요구되는 바는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에 눈 감아 버리기도 한다.

 물론 마냥 사회를 원망만 하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지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어폐가 있다. 복잡하고 급변하는 사회가 신물이나 지쳐버린다고 늘어진 채 가만히 있겠다고 해결될 일은 없다. 그렇다고 그저 남들이 다 하는 그래서 나도 해야 할 것만 같은 일들에 치여 틀에 박힌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라고 사회는 정해 놓은 채 이를 할 줄 아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으로 구분 지어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하나씩 해 나간다면 분명 아저씨가 말씀하신 ‘젊은이’들도 더는 무기력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따라 하기에 익숙해진, 수동적인 삶이 더 편해진 20, 30세대들이 조금만이라도 더 능동적으로, 아니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자 한다면 조금이라도 덜 힘든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런 젊은이들의 고충도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있는 사회 선배님들의 따뜻한 시선과 배려가 더해진다면 조만간 이 사회도 쨍하고 해 뜰 날은 오지 않을까 싶다. 

비아냥과 비난 대신에 말이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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