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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May 26. 2018

왜 나는 안 생기는 걸까?

“이번에도 사랑이 아니었다. 늘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면 사랑이 아니다.난 아직도 사랑을 못 해봤다. 첫사랑도 못 해본 거다.”

- 영화 아는 여자(2004)


 당연히 생길 줄 알았다. 대학생이 되면 당연히 생길 줄 알았다. 너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라면, 그리고 대학생이라면 연애를 하는 것이다. 이는 내게 절대 명제이자 자연법칙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만 믿고 긴 시간을 버텼다.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인고의 시간이 보상받으리라. 해는 동쪽에서 뜨고, 범죄자는 대통령이라도 감옥에 가고, 대학생은 연애를 한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세상의 이치다.


 하필이면 내가, 법칙의 예외가 되고 말았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믿지 못할 것 같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말하면 역병(疫病) 환자를 보듯이 쳐다본다. 인상 팍 쓰고 있는 걸 보면 몹시 섭섭하다. 뭔가 큰 죄를 저지른 것 같다. 얘기하다 보면 입장이 곤란해진다. 난 무성애자, 종교인이 아니므로 이 상황의 형식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이며, 결론적으로 웃기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한심하고 불쌍하게 보이기 싫어서 연애 얘기가 나오면 입을 닫아버린다.


 그러려니 했다. 언젠가는 생기겠지. 나태하게 있다가 최근 심각성을 감지했다. 달력을 보는데 가슴에 격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날짜를 확인하는 게 고통스러워졌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 나이를 원망하는 것이었다. 11월 생(生)이므로, 사실상 두 살을 손해 본다. 아니 도대체… 검색해보니 북한에서도 만 나이를 사용한다. 한국 나이, 한국 나이라고 하는데 정말 대한민국에서만 쓰는 계산법이다. 최악의 적폐는 따로 있었다. ‘이게 나라냐’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더는 우유부단하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연애 관련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 관심사는 남북관계, 지방선거 따위가 아니라 연애 문제여야 한다는 걸 자각했다. 인터넷에서 연애에 관한 각종 정보를 뒤지며 안도감과 함께 공포감을 느꼈다. 대학생은 연애한다는 섭리에서 벗어난 사람이 상당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고, 곧 있으면 ‘마법사’가 된다는 사실에 공포감을 느꼈다. 인터넷에서 수집한 연애 못 하는 사람의 개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자기관리를 못한다. 그래서 외모가 불편하다.
2. 주제파악을 못한다. 그래서 불합리하게 눈이 높다.
3. 인간관계가 협소하다. 그래서 주변에 이성이 없다.
4. 소심하고 겁이 많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 외 범죄적 인간, 여성 혐오자 등 결격 사유가 위중한 경우도 있었다. 종합하면 전체적으로 좀 ‘부당한’ 사람이 연애를 못 하는 것 같다. 확실하게 해당하는 것도 있고 대략 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만 대체로 공감하며, 팔자 좋게 킬킬 웃으며 봤다. 반성하고 강한 개선의 의지를 보여도 모자랄 판에 웃고 있으니 참으로 대책이 없다. 그렇지만 성찰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이런 낯 뜨거운 얘기를 할 정도로 나와의 거리를 만들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다짐한 게 있다.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롭겠다는 것이다.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유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여러 활동을 하며 다양한 인간관계가 생겼지만 단 한 명의 전화번호도 저장하지 않았다. 일관성이자 철칙이었다. 그런 관계에 얽매이게 되면 정신이 흐트러진다는 게 이유였다. 지금도 주소록에 단 한 명의 전화번호도 없다. 일이 있으면 연락이 오는 법이다. 말도 안 되는 소신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유명 코미디언의 말처럼 늦었다고 생각할 때 정말 늦은 것이었다. 이렇듯 연애 못 하는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삶의 철학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개인적인 사례는 3개밖에 되지 않는다. 한 줌도 안 되는 사례에 ‘연애 루저’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 무서워서 피한다. 그래서 관계랄 게 생기지 않는다.
2.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3. 반작용으로 몹쓸 짓을 저지른다. 그래서 자존감이 산산조각 난다.
4.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면에는 소우주(小宇宙)가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는 천재 개발자가 된다. 정교한 시뮬레이션 체계를 구축한다. 토니 스타크가 된 기분이다. 사소한 데이터라 할지라도 홀대하지 않는다. 추론을 통해 상관관계를 기필코 찾아낸다. 편린을 편취하고 맥락을 독창적으로 변용해서 무수한 개연성을 도출해낸다. 기발한 발상, 비상한 기억력, 예리한 관찰력, 날카로운 언어 감각, 응용능력, 폭발하는 상상력, 창의성, 섬세한 감성으로 허구의 세계를 통찰해낸다. 혼재된 단서가 정밀하게 연결되고 치밀한 논리로 구성되어 소우주(小宇宙)를 이룰 때 마침내 예술적인 짝사랑 프로그램이 완성된다.


 상대가 이런 복잡성을 알 도리는 없고, 현실에서는 아마 “저건 뭐야”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저 어수룩하고 모자라 보이는 녀석의 정체는 뭘까?’라는 흥미를 유발했을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모의실험을 거치고도 막상 마주치면 얼어버린다. 머릿속은 통제가 되는데 몸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 긴장되고 얼굴이 빨개진다. 회심의 프로그램을 자꾸만 의식해서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다.

 한 번 패턴이 형성되면 벗어나기 힘들다. 악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억압된 감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된다. 뜬금없는 보상심리가 발동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끝난 게 너무 억울했다. 억울할 일이 아닌데 억울했다. 그래서 무턱대고 고백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가 남은 인격도 붕괴됐다. 워낙 호되게 비용을 치러서 상처받기 싫은 마음에 죽은 듯이 지냈다. 가만히 있으니 원점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 또다시 아무것도 안 하고 끝났다. 핑계는 수만 가지에 달한다. 이 유전자가 어떻게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미스터리하다.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비겁함이다. 위험 부담을 지기 싫어서 텔레파시나 쏘고 있다. 이래서 ‘마법사’가 된다고 하는 모양이다. 또 하나는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정작 타인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다. 혼자 머릿속에 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똑같을 것이다. 문제는 내게 있고 스스로 바뀌지 않는 한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연민에 빠질 게 아니라 ‘나는 언제 달라질 수 있을까?’ 되물어야 한다. 


 대학생이 되면 연애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런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 최소한 이런 처지는 면할 수 있는 방법이다.


1.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알고 가능한 한 많이 맺기.
2. 외모, 삶의 방식을 표준화하기.
3.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기.

 타인과 관계를 맺다 보면 자존감이 평균적인 수준으로 조정된다. 이성에 대한 공포, 거절에 대한 공포도 줄어든다. 혼자가 편하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혼자 오래 있어봐서 아는데, 그냥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자기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립된다. 사람(人)이라는 한자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외모는 상대적인 면이 강하므로 각자 알아서 관리할 일이다. 헤어스타일이든 패션이든 남과 비슷하게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한다. 삶의 방식을 표준화한다는 건 일부러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황당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유행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SNS와 친근해지는 것도 작은 노력이다. 남북관계, 지방선거 등을 소재로 공감대를 찾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식으로든 선택해야 한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연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대학생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연애하게 되어 있다는, 허무맹랑한 가짜뉴스를 보면 신고해야 한다. 남자의 경우 외모가 아주 빼어나지 않은 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성격에 맞지 않더라도 교과서적인 얘기를 새겨두는 게 좋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어른들이 하는 말을 무시해왔는데 알고 보니 삶의 지혜가 담긴 조언이었다. 적어도 연애를 하려면 남을 흉내 낼 줄 알아야 한다. 보편성의 결여는 치명적인 결함이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노력하지 않고 거저먹으려다가 이렇게 됐다. 곧 있으면 ‘마법사’가 되어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는 세계에 속해 지구를 보위할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아이작 뉴턴, 프리드리히 니체도 평생 솔로였다. 그들의 높은 학문적 성취는 마법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즐거운 걸 보니 아직 살 만한 모양이다. 반년 남았다. 우리 모두 파이팅.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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