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마요 Feb 15. 2016

백조의 호수, 시르미오네

이탈리아 북부 여행



여행을 앞두고 메일을 하나 받았다.


제가 가고자 하는 곳은 가르다 호수입니다. 시르미오네도 그중 하나입니다만, 반나절만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시르미오네를 가기 위해 내리는 역, 마을 데센자노를 기점으로 활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르다 호수 주변에는 마을이 참 많은데, 각 마을마다 배산임수의 풍경이 다르지 말입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스위스와 가까워지면서 물이 맑아진다는 가르다 호수는 꼭 가르리다.


잔이 메일에 적어 준 블로그 주소를 타고 2010년 12월에 누군가가 포스팅한 글을 읽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지상의 천국'이라는 글에는 투명한 호수에서 백조와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백조와 인간의 사랑을 그린 발레 '백조의 호수' 같은 비현실적인 장면 속에서 우아하게 수영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금기 없는 담담한 호수에서는 역동적인 발차기와 거친 호흡이 난무하는 바다 수영과 달리 유연한 동작으로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초연을 앞둔 발레리나처럼 설렘과 긴장을 안고 시르미오네로 향했다.



데센자노에서 출발한 배는 제일 먼저 시르미오네에 승객을 내려 주고 다음 항구로 떠난다. @jan.film
선착장에 내리면 멀지 않은 곳에 시르미오네 요새가 보인다. @jan.film
호수를 빙 두르고 있는 시르미오네 요새는 한편으로 호수를 안고 있기도 하다. @jan.film



시르미오네 선착장 근처에는 넓은 테라스 가득 의자를 내어 놓은 레스토랑들이 많았다. 로마 귀족들이 사랑했다는 휴양지답지 않게 이 곳의 음식값은 비싼 편이 아니었다. 우리도 가까운 식당에 자리를 잡고 소박한 서민의 음식들을 주문했다. 보리는 이탈리아 정통 까르보나라를 기대했지만,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크림 파스타가 등장했다. 나는 원피스 안에 야무지게 챙겨 입은 수영복을 생각하며 주문한 사과 샐러드를 야금야금 먹었다. 인심이 후한 샐러드였다.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멍멍이는 친절하기도 하다.
멍멍이 침이 잔뜩 묻은 손을 닦습니다.



수영을 즐길 수 있는 호숫가를 안내하는 표지판을 따라 중세의 골목을 걸었다. 벽돌을 모아 세운 작은 상점들을 구경하면서 돌과 돌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호수를 향해 뻗은 길을 만난다. 그 길의 끝에는 어김없이 호수를 향하고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다. 호수 물에 젖은 몸을 누이고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기에 적당한 자리였다. 곧 해가 질 것 같아서 조급해졌다. 가끔씩 지나가는 개에게 홀려 멈추기는 했지만 비치를 향하는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호숫가도 비치(Beach)라고 부르는 것을 이곳에서 배웠다.
하얀 바지를 차려 입은 할아버지의 뒤태가 마음에 드는 것이다.
내 꿈을 뚫고 나온 잔. 이것이 현실의 남친이다.



DREAM. 오노 요코의 메시지가 먼저 반기는 호숫가는 한산했다. 한낮의 더위를 식혔던 호수가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쌀쌀맞게 돌아선 탓이다. 골목에서 마주쳤던 커다란 개 두 마리만이 호수에 몸을 담갔다가 내달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발랄한 생명체들의 풍성한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으로 백조 곁에서 꿈꿨던 수중 발레의 아쉬움을 달랬다. 요코의 DREAM에 뚫어 놓은 몇 개의  바람구멍 사이로 몇몇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고 사진을 찍었다. 놀이 공원에 온 유치원생 같은 해맑은 표정들이 꿈을 뚫고 나온다. 그녀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덕분에 시르미오네 비치를 찾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



호수의 수면과 90도를 이루는 엉덩이가 있다.



석양은 꽤 오랫동안 호수에 머물렀다. 우리는 한적한 나루터에 자리를 잡고 석양과 백조를  바라보았다. 내가 슬쩍 곁으로 다가가도 백조는 경계하지 않고 자신 있게 동작을 이어갔다. 발끝으로 몸을 지탱하거나 다리를 찢지 않아도 백조가 그리는 곡선은 우아했다. 엉덩이만 수면 위로 내어 놓는 귀여운 자맥질을 선보이던 오리는 호수로 떨어지는 아이스크림 콘 부스러기를 잽싸게  낚아챘다. 젤라또로 입가심을 하다니 과연 이탈리아의 오리답다. 한참 동안 백조의 자태와 오리의 재롱을  훔쳐보다가 고개를 들면 해를 삼켜 붉어진 물결이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잔은 나루터에 드러 누워서 호수의 풍경을 담았다.



드넓은 호수의 석양은 짙은 침묵을 불러냈다. 모국어로도  담아내기 힘든 벅찬 감정이 잔의 검은 눈동자에도 맺혔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가 건넨 메시지는 절반은 옳았고, 절반은 틀렸다. 시르미오네는 반나절만 있어도 충분히 좋은 곳이다. 하지만 결코 반나절만 있어도 될 곳은 아니었다. 발단과 절정만 보고 극장을 벗어난 것 같은 아쉬움을 안고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데센자노 선착장에 다시 도착했을 때, 호숫가는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어두운 길을 익숙하게 더듬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불이 꺼진 거실의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마리사 이모가 우리를 반겼다.







정사각형 사진은 모두 포토그래퍼 김보리가 찍어 주었습니다. www.kimbori.com




매거진의 이전글 빙하가 만들어낸 호수 마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