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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요 Jan 11. 2016

빙하가 만들어낸 호수 마을

데센자노 델 가르다



네 번째 짐을 꾸렸다. 여름 옷을 많이 챙기지 않아 요 며칠 같은 옷만 입은 덕분에 긴 바지와 우비, 긴팔 셔츠는 여전히 배낭 밑바닥에 짓눌려 있었다. 충전을 하느라 콘센트에 꽂아 놓은 각종 전자 기계들을 깨우고 남프랑스에서 요긴하게 사용했던 비치 타월을 둘둘 말아서 배낭 뚜껑 아래 끼워 넣으면 얼추 이동할 준비가 끝난다. 기차에서 간단히 먹을 간식과 물을 에코백에 챙기고 나섰다.





세 사람이 꼭짓점을 차지하면 꼭 맞을 삼각형 모양의 엘리베이터는 나무로 만든 문을 두 번 닫아야 천천히 움직였다. 잔과 내가 짊어진 커다란 배낭 때문에 보리는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왔다. 캐리어 대신 짊어진 배낭은 잔과 함께하고 싶은 여행의 모습과 닮았다. 우리는 두 다리로 성큼성큼 밟는 흙길과 바퀴 굴리는 소리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고요함이 좋았다. 배낭의 무게를 더해 꾹꾹 누른 발자국이 남은 곳에는 시선이 더욱 오래 머물었다. 그리고 빙하가 만들어낸 호수 마을, 데센자노로 향하는 길에는 아무래도 배낭이 잘 어울렸다.



2015년 9월 2일 13시 13분. 전광판을 확인하고 프랫폼을 찾아 나서고 있다.



밀라노 중앙역(MIlano Centrale)에서 데센자노(Desenzano) 역까지는 기차로 한 시간이 걸린다. 출발 시간이 임박하여 2등석에 오르니 이미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채우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기차는 칸칸마다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몇 번의 이동 끝에 뽀얀 얼굴의 곱슬머리 청년을 마주하고 자리에 앉았다. 청년은 곧 고개를 숙이고 잠에 빠져들었고, 우리는 숙소에서 싸온 복숭아 도시락을 꺼내서 나눠 먹었다.



이것이 바로 제철 복숭아네. 일단 한번 잡쒀 보게.



데센자노는 작고 조용한 역이었다. 그 앞에서 잔은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담배를 말아 피웠다. 어디를 가도 역 앞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와 무릎을 마주 했던 곱슬머리 청년도 곧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마중 나온 일행이 건넨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녹아드는 그의 모습이 부러웠다. 반면에 우리는 구글 지도 하나만 믿고 다음 숙소를 찾아가야 한다. 밀라노와 확연히 다른 풍경이 낯설었지만, 모두가 벌써 이 마을을 좋아하고 있었다.



의욕이 넘치는 수도는 손만 씻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도로 양 옆으로 늘어진 우아한 집들은 한가로웠고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쾌적한 도로 한 편으로 가끔 차가 지나다닐 뿐이었다. 인기척에 놀란 작은 개들은 금방이라도 담을 넘을 듯 앙증맞게 짖었고, 목줄에 매인 커다란 개들은 귀찮은 듯 우리를 쳐다보기만 했다. 잔은 이곳이 어릴 적 살았던, 그러니깐 30년 전의 한적한 제주 같다고 했지만 내겐 전에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일단 걷는 내내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물결이 호수라는 것부터 믿을 수 없었다.



그대로 멈춰라.
데센자노의 한적한 길. 저멀리 보이는 것이 가르다 호수.




Marisa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B&B도 잔이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집이었다. 이곳은 아침밥을 제공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했다. 처음 숙소 사진을 봤을 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가 봐도 휴대폰으로 대충 찍은 흐릿하고 음침한 사진이었다. 잔은 대충 찍은 그 사진이 특히 마음에 들어 이 집을 골랐다고 했다. 도착한 숙소는 온수가 콸콸 나오는 욕실과 깨끗하고 널찍한 침실, 가르다 호수를 내려다보며 정성껏 준비한 아침까지 숙소의 3요소를 완벽히 갖춘 곳이었다. 커다란 욕실은 웨스 앤더슨의 영화 속 한 장면 같이 바닥부터 타일, 세면대와 변기, 욕조까지 모두 분홍색이었다. 나는 그날 밤 두 다리를 쭉 뻗고 분홍 욕조에 누워 머리까지 물에 담갔다. 사랑스러운 목욕이었다.




마리사 이모가 마중을 나오고 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이모는 거침없이 탄산수와 빨간 오렌지 주스를 따라 주었다.
최선을 다해 안내해 주시는 이모.


2층에는 방이 세 개 있었는데  두 개는 손님용, 하나는 그녀의 방이었다. 이모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라찌에'와 '쁘레고', '고맙습니다'와 '천만에요'를 탁구공처럼 주고받기만 해도 기분 좋은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그녀가 건네는 끝이 올라간 '쁘레고'가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단어였다. 그녀와의 반가운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시르미오네로 향했다.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이었지만 계획을 바꾸어 데센자노 항구에서 보트를 타기로 했다. 버스 노선을 물어봤지만, 보트 안내 책자를 가져다준 그녀 덕분이었다.





데센자노 항구는 여행객과 상점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지만, 선착장의 매표소는 묵묵히 닫혀 있었다. 이번에도 잔이 나서서 표를 구입하는 법을 알아냈다.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눈이 내린 머리를 뒤로 묶은 할아버지는 유창한 영어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매표소가 열렸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배는 시르미오네에 사람을 내려 주고 다시 가르다 호수 곳곳의 다른 마을들을 들렀다가 이곳으로 돌아온다. 1인당 6유로를 내고 데센자노와 시르미오네 왕복 승차권을 구입했다. 기념으로 간직하고픈 작은 티켓을 기대했지만 손에 쥔 것은 승선지와 하선지가 표기된 영수증이었다. 얇은 종이에 인쇄된 기다란 영화표를 처음 받은 날처럼 시무룩해졌다.




탈칵. 펀치로 승선권에 작은 구멍을 내고 배에 오른다. 보트를 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적당히 배를 채운 보트는 고요한 호수에 물줄기를 콸콸콸 쏟아내며 시르미오네로 향했다. 알프스의 빙하가 만들어 낸 호수의 맑은 풍경을 들이 마시고, 일렁이는 바람에 시름을 흘려 보내면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이름난 시르미오네에 도착한다. 나는 여전히 이곳이 호수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기원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시르미오네 땅도 깊은 호수의 속내가 궁금했는지 북쪽으로 몸을 길게 내밀어 반도를 이루고 있었다.







정사각형 사진은 모두 포토그래퍼 김보리가 찍어 주었습니다.  www.kimbori.com



@jan.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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