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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요 Dec 26. 2015

나빌리오 운하의 상인

비가 오면 생각 나는 그 사람



나는 아직 여행에 서툴다.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여행은 긴장과 불안을 만든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두렵기도 하지만 귀한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점이 더욱 속을 상하게 한다. 충분하지 못한 여행 일정은 마음의 여유를 빼앗는다. 낯선 곳에서 시간을 아끼려면 일단 물어보는 것이 최선이다. 안타깝게도 질문에 인색한 나는 걷기를 예찬하며 방랑을 긍정하는 쪽이다. 다행히 잔은 여행 내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덕분에 우리는 대부분의 목적지에 크게 헤매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밀라노의 빌딩 틈에서 우리는 헤매고 말았다.



예쁜 아가씨는 마음씨도 좋아. .



여행을 준비하면서 거창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쇼핑 계획을 세웠다. 잔의 쇼핑 목록에는 가죽 재킷과 프라이탁 가방이 담겨 있었다. 잔은 트럭 방수포를 재활용해서 만든 프라이탁 가방을 좋아했는데, 프라이탁의 본고장 유럽에서 만날 다양한 디자인에 기대가 컸다. 그는 검색을 통해 밀라노 꼬르소 꼬모에 있는 프라이탁 매장을  알아냈다. 우리는 묻고 걷기를 반복하여 꼬르소 꼬모에 도착했지만 매장을 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높은 빌딩들이 둘러싼 깔끔한 쇼핑의 거리는 그나마 남은 걷는 즐거움과 방랑의 긍정적인 힘을 앗아갔다. 우리는 가방을 포기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러 나빌리오 운하로 향했다. 달콤한 젤라또를 먹고, 아페리티보를 즐길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알아보니 우리가 찾아 헤맨 프라이탁 매장은 꼬르소 꼬모에 있었다. 그저 주소인 줄 알았던 10 꼬르소 꼬모는 유명한 편집 매장의 이름이기도 했다. 심지어 나는 10 꼬르꼬 소모의 입구를 보고 '주소를 참 예쁘게도 써놨네.'라고 생각했었다. 우리의 쇼핑 계획은 이렇게 허술했다.



 가방 구매에 실패하고 원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비가 내리기 전 나빌리오 운하



쭉 뻗은 운하 양 옆으로 노천 레스토랑과 상점들이 즐비하다. 나빌리오의 물길은 두오모 건설이 낳은 것이다. 이는 두오모 건설에 필요한 대리석을 운반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많은 뱃사공들이 엄마새처럼 대리석을 물어다 두오모를 살찌웠을 것이다. 500년에 가까운 끈질긴 보살핌에 밀라노 두오모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가톨릭 대성당이 되었고, 지금은 이 물길이 이방인들을 끌어다가 주민들을 먹이고 있다. 나는 잔이 사 온 젤라또를 아기새처럼 받아먹었다. 달큰하고 끈끈한 맛이 났다. 잔은 여행 내내 모르는 길과 함께 먹이도 물어다 주었다.



나빌리오 그랑데 지구 초입에 있는 유명한 젤라또 가게 RINOMATA GELATERIA.



해가 지기 시작하면 나빌리오 지구에 밀집해 있는 레스토랑들이 활기를 찾는다. 우리도 '해피 아워'에 맞춰 호객 행위를 하는 청년을 따라 몇몇 레스토랑에서 준비된 핑거 푸드를 둘러보았다. 입맛을 돋우는 본래의 '아페리티보' 문화와 달리 여행객에게 '해피 아워'는 10유로 남짓한 돈으로 음료 한 잔을 포함한 다양한 핑거 푸드를 무한정 먹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짐짓 식비를 절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억지로 위를 열고 속을 채울 만큼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치열한 호객 경쟁이 일어나는 레스토랑은 피곤한 발길을 돌아서게 했다.



지쳐 누워버린 햇살 때문에 개의 그림자가 더욱 길어졌다.



비교적 조용한 카페 테라스에 앉아서 조금 쉬기로 했다. 'SOFA CAFE'라고 적힌 소박한 간판 중앙에는 귀여운 소파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메뉴판에는 음료마다 두 개의 가격이 적혀 있어서 무슨 차이냐고 물어봤더니 실내 소파에서 먹으면 가격이 조금 더 비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실내에는 몸을 파묻을 수 있는 크고 멋스럽게 해진 소파들이 있었다. 덩치값을 하는 녀석들이다. 잔과 나는 카푸치노를, 보리는 코카콜라를 시켜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갑자기 비가 내렸고, 몇몇 손님은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그저 의자를 바싹 당기고 차양막 아래에 가까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잇대었다.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앉으니 이야기의 밀도가 높아진다. "엄브렐라, 엄브렐라"를 외치는 거리의 상인들의 손이 이야기 중간에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금방 그칠 것 같았던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트램을 타러 갔다. 트램에서 내릴 때는 비가 그쳐 있었다. 이제 나빌리오 운하의 상인들은 신속하게 우산을 접고 장미꽃을 내밀 시간이다. 비가 내려 운치가 더해진 테라스에서 농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둘, 그 사이에 불쑥 끼어드는 장미 한 송이. 확실히 우산보다는 승률이 높아 보인다. 우리는 우산을 포기하고 아낀 돈으로 크로와상을 사서 소박한 저녁상에 올렸다. 조심스럽게 꺼낸 와인 잔에 맥주를 따르고 복숭아 샐러드를 곁들이니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물개 박수.



정사각형 사진은 모두 포토그래퍼 김보리가 찍어 주었습니다.  www.kimb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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