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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요 Dec 12. 2015

두오모에서 고해성사

이탈리아 북부 여행



닷새 동안의 휴가에 살이 제법 빠졌다. 꽤 무거운 배낭을 짊어 지기고 열심히 걷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입맛을 잃어버린 탓이 컸다. 대책 없이 비싼 음식에 섣불리 지갑을 열 수 없는 처지였고, 고심하다 선택한 적당한 가격의 음식들은 대부분 만족스럽지 않았다. 평소에도 음식에 대한 욕심이 크게 없는 우리는 때마다 찾아오는 허기를 달래는 정도로 양식을 공급했다. 나는 제철 과일과 샐러드를 주로 먹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와서 입맛이 돌아서다니, 지금 생각해 보니 원통한 일이다.



여행 내내 사랑했던 납작 복숭아. 싸고 맛있고 껍질째 먹기도 좋다.
니스 중앙역 근처의 이탈리안 커피숍. @jan.film



니스에서 밀라노까지는 텔로(thello) 열차를 이용했다. 마침 올해 봄부터 텔로 열차에 니스 - 밀라노 구간이 추가되어 벤티미글리아에서 환승을 하지 않고 4시간 40분 만에 밀라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아침 일찍 출발하는 기차 때문에 포기한 모닝커피가 조금 아쉬웠다. 숙소 앞에는 두 잔을 내리 비울 정도로 싸고 맛있는 커피숍이 있었는데, 아침 일찍 찾았을 때는 문이 닫혀 있었다. 아직 불어가 서툰 이탈리아 여인이 운영하는 커피숍은 이틀 전 찾았던 피자 가게처럼 곳곳이 이탈리아 국기와 특유의 색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하면 피자는 버리고 커피는 취할 것이라 다짐하며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쉬어 갈 때마다 불어와 이태리어를 번갈아가며 정차역을 안내했다. 아무런 제재없이 국경을 넘을 정도로 모호한 두 나라의 경계는 불어와 이태리어의 발음에서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5세기에 걸쳐서 정교하게 단장한 밀라노 대성당의 웅장함은 절로 고개를 젖히고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위대한 건축물을 앞에 두고도 관광 명소에서 느끼는 괜한 반발심이 꿈틀거렸다. 잔은 두오모 광장 옆의 한적한 골목으로 나를 데려 갔다. 그가 십 년 전에 좋아했던 이 골목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트램이 운치를 더하는 골목에는 테라스를 넓게 쓰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밖으로 내어 놓은 메뉴판의 사진을 뒤척이자 오렌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늘씬한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두오모 근처 bar의 음식들을 폄하하며, 행여나 우리가 밀라노 음식점의 상술에 당할까 봐 걱정했다. 그녀의 레스토랑에서 취급하는 신선한 재료를 자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사진 속의 음식들은 꽤 먹음직스러웠고 가격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밀라노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안그래도 충분히 멋있는 오빠가 씨익 웃으며 오토바이에 올라 탔다.
두오모보다 아름다운 밀라노 일상에 화룡점정을 찍는 오빠의 뒤태.



두오모에서 천천히 걸어 스포르체스코 성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 성을 설명할 때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도나토 브라만테 등 천재 건축가와 예술가의 이름이 아무렇지 않게 동원된다. 성 앞 어딘가 '저희가 지었습니다. 설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테리어: 미켈란젤로'라고 적힌 초석이 놓여 있을 것 같았다. 누구의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따뜻한 다갈색의 벽돌로 쌓아 올린 성벽이 늦여름의 초목들과 어우러져 대도시의 관광 인파에 밀려 주름 잡힌 마음을 풀어 주었다.





나폴레옹의 밀라노 입성을 기리는 '평화의 문'과 스포르체스코 성 사이에는 셈피오네 공원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잔디 위에 널브러진 한량들과 저마다의 운동으로 땀을 흘리는 사람들, 우거진 초목들 사이에서 은밀한 연애를 즐기는 연인과 활개를 펴고 내달리는 반려견들까지 서로 전혀 방해가 되지 않도록 포용하고 있는 이곳은 과거 밀라노 최고 귀족의 사냥터다운 거대한 규모였다. 우리는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슬쩍 일어나 마실 나온 동네 사람처럼 옆구리 스트레칭을 하거나, 지친 다리와 어깨를 주무르기도 했다.



잔은 나무 사이로 내리 쬐는 비스듬한 빛줄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잡고 말것이다. 당분간 저주한다, 오랜지색.
해가 질 무렵에 스포르체스코 성의 성벽은 더욱 아름다운 색으로 물든다.



깜깜해진 공원을 벗어나니 배고픔이  밀려왔다. 잔이 검색으로 찾아낸 식당은 거리가 좀 있어서 지친 몸으로 찾아가기엔 무리였다. 그리 멀지 않은 두오모 근처 레스토랑을 다시 찾았을 때, 오렌지색 그녀는 우리를 기억하고 반겨 주었다. 잔은 돼지고기와 구운 야채, 콜라를 나는 버섯 리조또와 물을 시켰다. 우리의 부실한 식사를 걱정해 코스 요리를 권하는 그녀의 성화에 못이겨 닭고기 수프도 추가되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국물에 쌀밥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한국에서도 즐겨 먹던 버섯 리조또를 드디어 본토에서 먹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마주한 음식은 오직 양송이버섯 두 개를 조각내어 섞은 퍼진 흰 죽이었다. 나머지 음식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먹다 남긴 듯한 닭고기 수프는 정체가 의심스러워 종업원을 불러 설명을 요청할 정도였다. '저기, 이게 대체 무슨 음식인가요?'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식당의 모든 손님이 모두 선량한 관광객이라는 것을 장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다른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아, 어쩌다가.......' 옆 테이블의 노부부는 유리벽에 비친 잔의 잔뜩 찌푸린 표정을 가리키며 위로가 섞인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우리는 팔십 유로에 가까운 돈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잔은 이 식당에 카드 사용 기록조차 남기길 거부했다. 저녁 한 끼 때문에 소중한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태연한 척 돌아섰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분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광장에서 더욱 존재감을 드러낸 두오모도 허탈한 심정을 달래 주지는 못했다. 그녀가 밀라노 두오모에서 고해성사하는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 본다. '신부님, 제가 오늘도 순진한 여행객들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주님, 그녀를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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