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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요 Jan 29. 2017

일종의 노숙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여섯 번째

어떤 날의 저녁 장소. Maitai Esplanade Reserve. 


마음에 드는 탁 트인 장소가 부엌이 되고 식탁이 된다. 바다를 마주한 곳에서 낮에 잡은 생선을 넣어 라면을 끓여 먹고, 넓은 잔디밭을 독차지하고 닭볶음탕을 먹기도 한다. 별빛 아래서 스트레칭을 하다 잠이 들고 갈매기의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깬다. 일종의 노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며칠 전부터 우리는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분명히 불편하겠지만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뒷좌석에 침대와 서랍장을 만들어 넣은 제법 근사한 캠퍼밴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뉴질랜드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뉴질랜드는 캠퍼들을 위한 시설이 훌륭하다. 내가 사는 넬슨에도 상가들이 문을 닫은 저녁 시간 이후에 널찍한 주차장을 무료 캠프 사이트로 운영하는 곳이 있다. 그중에 한 곳은 샤워 시설과, 세탁기 사용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 곳에 차를 세워두고 아침이면 샤워 시설을 이용하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씻어야만 했다. 일자리를 구하면서 만든 이력서에는 나는 어떤 상황에도 적응을 잘하는 긍정적인 사람, 약속 시간을 어기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5분에 2달러, 샤워비를 지불하기 위해 동전을 찾는 내게 잔은 4달러를 건네주며 그까짓 거 넉넉하게 씻으라며 호의를 베풀었다. 덕분에 '샤워는 2달러고, 5분 안에 끝내야 해.'라고 안내하는 직원에게 나는 4달러를 내밀며 '10분 쓸게요'라며 사치를 부리며 여유 있게 샤워실로 들어갔다. 도착하자마자 시간을 확인하고 잽싸게 샤워를 마치니 금세 5분이 지났다. 바디 로션을 바르고 옷을 챙겨 입으니 정확히 10분이 지났다. 혹시 물이 끊겼으려나 싶어 샤워 꼭지를 돌려 보니 비록 차갑지만 아직 물이 나온다. 인심이 고약한 시스템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약속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샤워도 할 수 있는 Montgomery Square Carpark의 저녁 풍경. 


젖은 머리를 말릴 방법이 없어서 물을 뚝뚝 흘리며 밖으로 나오니 토요일을 맞아 아침부터 장이 들어서 있다. 오가닉 채소와 각종 먹을거리들로 둘러 무장한 생기발랄한 사람들 사이에 젖은 머리의 물기를 커다란 샤워 타월로 닦아 내고 있는 내가 우스꽝스럽다. 부끄러운 마음보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이 당겨 서둘러 차에 올라 스킨로션을 발랐다. 인파를 피해 근처 공원에서 시리얼과 머핀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공중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을 했다. 핸드 드라이에 손을 말리다가 슬쩍 다리를 굽혀 머리도 말려본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고 출근할 수 있다는 점에 희열을 느낀다. 어느덧 공중 화장실에서 머리를 말리는 내가 뿌듯해졌다. 


공중 샤워실 이용 둘째 날. 오늘은 호기롭게 2달러만 들고 길을 나섰다. 나는 이제 2달러로도 충분히 잘 씻을 수 있는 요령이 생겼다. 적어도 불의의 사고로 5분 안에 샤워를 끝내지 못해도 비누칠 범벅으로 쫓겨날 염려는 없다는 것을 아는 자의 배짱이다. 오늘 아침 직원 언니는 기분이 좋았는지 2달러를 내미는 내게 샤워 10분 안에 끝내야 한다며 다른 조건을 제안했다. 시계를 확인하지 않고 샤워를 마치고, 챙겨간 스킨로션을 얼굴에 충분히 바르고 나왔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일요일에도 마켓을 열어 집에서 가져온 중고 물건들을 내놓고 있다. 피부가 당기지 않으니 여유롭게 선글라스를 끼고 주차장 구석에 있는 우리 집, 우리 차로 찾아간다. 오늘도 나는 이력서에 적힌 나를 진실되게 증명하는 삶을 지내고 있다. 


매일 바뀌는 이웃 청년들. 화장실 앞에서 정답게 함께 이를 닦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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