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다섯 번째
'어서 오세요.' 하림 오빠가 만든 페이스북 그룹 <기왕이면 뉴질랜드에서 살자>의 인사말은 이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이 페이지가 계기가 되어 각자의 사연으로 한국에서부터 닿아 있던 인연들이 뉴질랜드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 만난 지인의 지인들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학연과 지연으로 우리는 제법 엮어 있는 사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흥미로운 것은 내 전 남자 친구의 지인들이 잔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랄까. 역시 지구는 둥글었다.
오랜만에 만난 하림 오빠는 이제 막 뉴질랜드 생활 한 달을 맞은 나를 축하해주었다. 우리는 타후나누이(Tahunanui)의 한 홀리데이 파크 근처에서 근사한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그곳에는 스위치만 누르면 뜨거워지는 무료 바비큐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휴대용 가스레인지 없이도 캠핑장 한편에서 바비큐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한 번, 그곳이 너무나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두 번 감탄한다. 뜨거운 불판에 고기가 익는 소리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소고기를 적당히 익혀 빵 사이에 끼워 넣고 여행자가 차 안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치즈며 버터가 어우러지니 훌륭한 스테이크 버거가 되었다. 아침에 잔이 낚아 올린 생선도 제법 살이 두터웠고, 그 향기는 너무나 아름다워 갈매기들을 애태우기 충분했다.
캠핑하기 너무나 좋은 계절이다. 홀리데이 파크를 가득 채운 커다란 캐러밴과 각종 고급 캠핑 도구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아이템은 화분이었다. 집에서 모셔온 작지 않은 화분들이 이들의 캠핑 문화와 삶의 태도를 색색깔로 대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예쁨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넘나 사랑스럽다. 식물을 사랑하고 그곳에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나는 그 여유가 샘이 나서 결국에는 꽃이, 나무가 부러워졌다. 식물로 태어난다면 철저히 비생산적인 그저 예쁜 것으로 태어나 마냥 사랑받고 싶다.
홀리데이 파크에는 정해진 구역이 있어서 선을 밟으면 죽지는 않지만, 남의 집을 밟고 있는 실례를 저지르게 된다. 우리 옆 집에는 곰과 공룡의 탈을 뒤집어쓴 꼬마들의 자전거 연습이 한창이었다. 사진을 찍어서 보여 주었더니 사진 속 본인에게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넨다. 귀를 기울여 옹아리 영어에 집중해야 하는 나와 달리 꼬마들은 내 말을 쉬이 듣고 서너 배가 넘는 문장을 돌려준다. 애초에 내 말은 별 관심이 없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뱉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잔뜩 인상을 구긴 곰 형의 사진은 특별히 치즈를 외친 것이라는 설명을 얻어냈다. 너무나 귀여워서 귀가 녹아 버릴 것 같다. 나는 영어 공부한 보람을 이런 곳에서 찾고 있다.
네 사람이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이 하림 오빠와 은영 언니가 무려 양고기와 닭고기가 올려진 호화로운 저녁을 차려 냈다. 이윽고 "씩아, 와서 밥 먹어."라는 은영 언니의 부름에 내 가슴 한 구석이 얼얼해졌다. 나는 지금 내 옆에 따뜻한 밥을 차려 놓고 내 별명을 완벽하게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4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외국으로 떠나는 언니에게 무라카미 하루끼의 수필집을 선물하며 삼시세끼 잘 챙겨 먹으라는 이야기를 더한 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렇게 뜻밖의 곳에서 기막힌 타이밍에 만난 언니는 내게 완벽한 한 끼를 선물해 주었다. 나는 잠시나마 꽃 화분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나 우리는 각자의 쉼터로 돌아갔고, 지금도 누군가는 북섬에서 다른 누구는 남섬에서 여행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 그 누구도 이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화분 신세지만, 모두가 뉴질랜드를 좋아하고 더 오래 머무르길 원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를 따라 기왕이면 뉴질랜드에서 살아볼 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