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스 패스 (Arthur's pass)
남섬 여행 셋째 날
모토 캠핑장에서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산책 나섰다. 산책을 나서는 잔의 손은 낚싯대와 휴대용 그물을 당연하게 쥐고 있다. 낚시꾼과 손을 잡고 산책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얼마 전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따뜻한 옷을 싸게 구입했다며 자랑하던 국방색 사냥 셔츠를 입으면 숲 속에서 남친을 찾기 쉽지 않다. 물고기가 색을 잘 구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자 친구를 낚기에는 좋은 복장이다.
맑고 투명한 아침 호수에 고스란히 비친 하늘 속으로 잔은 낚싯대를 던졌다. 나는 낚시꾼을 따라 호숫가로 내려가지 않고 적당한 자리에 자리를 깔고 챙겨 온 책을 읽었다. 물고기를 닮은 미끼가 '퐁' 하는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떨어진다. 무성한 수풀에 가려 잔이 보이지 않아도 미끼가 몸을 던지는 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되었다. '퐁' 한 번, 적어도 물고기에 홀려 물속으로 빨려들지는 않았구나, '퐁' 두 번, 외딴곳에 나 혼자 있는 건 아니구나 생각한다. 하지만 연이은 '퐁' 소리에도 소득은 없었다. 자리를 옮겨도 입질 한 번 없는 야속한 물고기 덕에 잔은 시무룩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조용한 이 호수 마을이 꽤 마음에 들었다.
큰 계획 없이 남쪽 끝으로 내려가고 있는 길에 아서스 패스(Arhur's Pass)에 들르기로 했다. 그레이 마우스에서 크라이스트 처치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높은 고개, 잔은 웅장한 산맥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고개를 좋아했다. 그래서 아서스 패스는 우리에게 넘어야 할 고개가 아니라 딛고 싶은 고개였다. 고개 입장에서 우리는 조금 더 반가운 손님이 아녔을까. 우리뿐만 아니라 빙하 시대의 빙하가 정상에 조금 남아있는 산맥이 펼쳐내는 절경이 유명하여 일부러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무거운 짐을 실은 우리의 캠핑카가 부지런히 오르막 길을 내딛는 중간에 예쁘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굽은 다리도 펴고 휴식을 취할 겸 차를 세웠더니 건물 앞에 세워진 오래된 마차를 비롯한 각종 장식품들이 예사롭지 않은 카페였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에 돼지, 돼지가 있었다. 차분히 빵을 굽는 고양이처럼 네 다리를 깔고 누은 모습이 빵가루를 묻혀 튀겨낸 소지지 빵 같았다. 덕분에 흥분한 내가 만드는 소리에 깜짝 놀란 돼지들은 오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뉴질랜드에서 만나기 어려운 돼지가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희귀한 카페에서 파는 커피 맛이 더욱 궁금해졌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알고 보니 레스토랑과 호텔과 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카페를 둘러보았다. 신기한 골동품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끌었던 것은 마오리의 초상화였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경외감을 갖게 만드는 문신이 새겨진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나는 그들의 삶의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꿰뚫고 있을 것 같은 그들에게 지혜를 구하고 싶었다. 선생님, 제가 낚시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없을까요. 따뜻한 커피가 대답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부드러운 스콘을 커피와 함께 먹으니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졌다.
꽤 높이 올라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쭈그려 앉아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제법 덩치가 큰 새 한 마리가 보였다. 뉴질랜드 높은 산에 산다는 대형 앵무새 키아(Kea)가 겁 없이 사람들 틈을 누비고 있었다. 멸종 위기에 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앵무새답지 않게 키아는 마치 출근한 배우처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진 찍기 좋게 적당히 포즈를 취하거나 주차된 차에 올라 어여쁜 날개를 뽐내면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다. 그냥 날아가 버렸으면 더 멋있었을텐데. 나는 키아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멀찌감치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백발의 아저씨가 훨씬 멋있었다. 그는 이 높은 고개를 홀로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나는 소녀 팬이 된 것처럼 사진을 찍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우리가 지나온 오티라 계곡 고가 도로가 훤히 보이는 다른 정망대에 닿는다. 산을 최대한 해치지 않고 설치한 아찔한 고가 도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우리는 좀처럼 하지 않던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꽤나 멋있는 장면 앞에서도 강한 바람에 떨리는 두 다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았지만, 잔은 그 장면 속으로 뛰어드는 유쾌한 포즈를 취했다. 푸르른 산맥과 바위가 잔과 잘 어우러졌다. 국방색 사냥 셔츠가 또 한몫을 했다. 이대로 잠복해서 야생 동물의 농밀한 삶을 취재해도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다.
쉽지 않은 내 남자에게 포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저녁거리 마련을 위해 또 한번 낚시에 도전했다. 호수 옆으로 길게 늘어진 목장을 따라 좁은 길을 앞뒤로 걸어가며 다섯 걸음에 한 번 꼴로 낚싯대를 휘둘렀다. 호수는 소 목장을 옆에 끼고 있었는데, 인적 드문 길에 사람이 나타나자 송아지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띄고 몰려왔다. 깨끗하고 윤기가 흘러넘치는 송아지였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소를 보니 아기를 낳으면 뉴질랜드에서 만든 분유를 먹이겠다는 친구의 말이 와 닿았다. 뉴질랜드에서 지내고 있다는 내게 소 젖을 짜냐고 묻던 친구였다. 아무래도 분유 계획이 없는 나는 이곳에서 뉴질랜드산 소고기를 실컷 먹기로 한다. 실제로 스쳐지나가는 소떼들에게 '안녕, 스테이크야!!'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뉴질랜드 환경 보호부(DOC: Department of Conservation)에서 운영하는 Goldsborough 캠핑장을 찾았다. 으리으리한 캠핑카 사이에 자리를 잡으니 해가 지고 있었다. 어른이 하룻밤 묵는데 8달러밖에 하지 않는 저렴한 캠핑장에는 화장실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안내 데스크의 요금함에 16달러를 넣고,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파스타가 완성되었을 때쯤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헤드 랜턴 빛에 의지한 어둠 속의 저녁 식사는 통통한 꽈배기 파스타처럼 귀엽기만 했다. 이런 소소한 귀여움이 캠핑의 불편함을 씻어 낸다. 하지만 더러워진 식기를 씻는 건 우리의 몫, 설거지를 내일로 미루었다. 역시 어둠 속에 간단히 얼굴만 씻고 별빛 아래 스트레칭을 한 뒤에 매트를 펼쳐 놓은 캠핑카에 오를 때, 은하수가 머리 위로 쏟아질 듯이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